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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암흑기서 빛을 찾다

충무로가 역사 속에서 ‘발칙한 시대’로 기록돼 있는 1930~1940년대에 푹 빠져 있다. 한국사에 있어서 암흑기인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한 대작 영화들이 제작에 들어가 눈길을 끌고 있다. 더군다나 김지운·박종원·정지우 등 중견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들은 기존의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처럼 시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감독들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망하는 것이 특색이다. 관객들이 낭만적이거나 신비스러우면서 미스터리한 시대로 탈바꿈한 이 시대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제작 바른손영화사업부)은 이중 가장 독특한 시대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서부극의 형식을 차용한 ‘만주 웨스턴 무비’를 표방한다. 서부극의 단골 인물인 현상 수배범, 열차털이범, 살인청부업자들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였던 20세기 초, 무정부주의와 다국적 문화가 번성했던 만주 벌판에서 오토바이에 각종 신무기들이 등장하는 액션활극이 될 전망이다. 100억원의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다. 톱스타 송강호·이병헌·정우성의 캐스팅으로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송강호는 ‘이상한 놈’, 이병헌이 ‘좋은 놈’, 정우성 ‘나쁜 놈’을 연기한다. 4월 중국에서 촬영을 시작해 내년 상반기에 개봉될 예정이다.

‘낙랑클럽’(제작 청어람)은 미 군정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국의 마타하리’ 여간첩 김수임과 그녀의 영원한 연인인 경성대 출신 공산주의자 이강국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다. 일제시대와 광복공간을 무대로 두 사람의 불꽃 같은 로맨스와 이념을 둘러싼 갈등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연출은 ‘영원한 제국’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만들었던 박종원 감독이 맡았다. 영화배우 손예진이 파란만장한 삶을 산 김수임 역에 캐스팅돼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톱스타들이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이강국 역할 캐스팅을 곧 마무리짓고 3월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개봉은 내년 초로 예정돼 있다.

‘해피엔드’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이 연출을 맡은 ‘모던보이’(제작 K&J엔터테인먼트)는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인 이지형 작가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영화화한 작품. 아버지는 친일파이지만 자신은 놀고 먹는 데만 일가견이 있는 한량 이해명이 자신을 매혹시키고 어느날 사라져버린 댄서 조난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는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전형적인 시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화려한 드레스에 중절모, 근사한 양복차림, 재즈음악만이 흐른다. 친일파들의 부패와 급속히 들어오는 신문물 사이에서 혼돈의 시기를 보낸 청춘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현재 캐스팅 중이고 5월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신인 형제감독인 정가형제가 연출을 맡은 ‘기담’은 1941년 경성의 안생병원에서 사흘간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사건을 그린다. ‘연기파 배우’ 김태우와 김보경이 동경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의사 부부를 연기하고 ‘비열한 거리’에서 주목받은 진구가 젊은 의사 역할을 맡았다. 지난 20일 크랭크인해 석달간 촬영을 마치고 7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제작진은 극중 주요 배경인 안생병원을 표현하기 위해 1년간의 프로덕션 디자인 작업을 거쳐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1200평 규모의 목조 세트를 재현했다. 1940년대라는 시대 배경은 신비스럽고 미스터리한 공간으로 표현될 전망이다.

현재 충무로에서는 위의 네 편 외에도 싸이더스FNH에서 ‘라디오 데이즈’를 비롯해 서너편이 현재 기획 중이다. 이렇게 1930~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 잇따라 제작되는 것은 엄숙하게만 바라봐야 했던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무로의 한 관계자는 “과거 독립운동가의 영웅적 투쟁이나 식민지 치하 유명 예술인들의 고뇌같이 여론의 비판을 받을 소지가 적은 소재만 만들어왔다”며 “하지만 우리 사회가 성숙하면서 다양한 소재를 그릴 수 있게 됐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개봉된 영화 ‘청연’에서 볼 수 있듯 일제강점기를 섣불리 다뤘다가는 미처 예상치도 못했던 구설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고 위험성도 경고했다.

〈최재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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