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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래의 꿈으로 본 역사]〈27〉‘생명의 은인’ 예지한 꿈

대사헌 맹사성과 지평 박안신이 평양군 조대림을 국문하는데, 임금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고문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해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저자에서 죽이려 하였다. 맹사성은 얼굴이 창백해져 말을 못하는데, 박안신은 침착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박안신은 맹사성에게 “그대는 상관이요, 나는 하관이나 이제 죽을 죄인이 되었으니, 어찌 높고 낮음이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대가 지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오늘은 이렇게도 겁을 내는가. 그대는 저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또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가져오라”고 하였으나 나졸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박안신이 눈을 부릅뜨고 “네가 만약 듣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반드시 너에게 화를 주겠다”고 꾸짖었다. 말소리와 안색을 더욱 엄하게 하니 나졸이 두려워해 마침내 기와조각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내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임금이 직간하는 신하를 죽였다는 오점이 남게 될까 두렵네”라는 시를 기와조각에 써 “속히 가서 임금께 보이라”며 나졸에게 주었다. 부득이 나졸이 궐내에 갖다 바치었다.

이때 좌의정 독곡 성석린이 신병 때문에 가마를 타고 궐내에 나아가 임금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온 힘을 다해 말하였다. 마침내 임금도 노염이 풀려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다.

맹사성이 젊어서 제관으로서 소격전(조선시대 하늘과 땅, 별에 지내는 도교의 초제를 맡아보던 관아)에 치재(제관이 입제 날부터 파제 다음 날까지 사흘 동안 몸을 깨끗이 함)를 하는데, 잠깐 졸았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칠성(七星)이 들어오신다”라고 전하였다. 잠에서 깬 공이 뜰에 내려가 공손히 맞았는데, 여섯 대부(大夫)는 이미 들어왔고, 일곱번째는 성석린이었다. 공이 죄를 얻어 저잣거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성석린이 극력 간해서 구명한 덕택에 죽음을 면하였다. 이후 명사성은 성석린을 평생 부모처럼 섬기었으며, 성석린이 죽은 뒤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사당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 〈용재총화 제3권〉

권별의 ‘해동잡록’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맹사성(1360~1438년)은 대사헌으로 목인해의 꾐에 빠져 모반의 군사를 일으킨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을 임의로 국문하였다. 그러나 태종으로부터 왕실의 친척인 조대림을 제거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는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목숨이 위태로움에 처하게 된다. 이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살펴본다.

<목인해를 찢어 죽이고, 심문하다>

목인해를 시가에서 찢어서 죽이는 형을 가하였다. “목인해는 본래 관노인데, 힘이 세다 하여 특별히 관직을 주고 숙위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흉역해 족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제 아내가 평양군 조대림 집의 계집종이라는 연줄을 구실 삼아 그 집에 출입하였다. 목인해는 나이 어린 평양군을 달콤한 말로 부추겨서 반역을 도모하게 하였다. 대간들이 의논해 조대림을 죽여서 번병(왕실을 수호하는 먼 밖의 감영이나 병영)을 없애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공초(供招)에서 ‘모약왕실(왕실을 약하게 하려고 도모하였다)’이란 네 글자를 받으라. 만일 승복하지 않거든 모질게 때려 신문하되, 그의 죽음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맹사성·서선·이안유·박안신 등이 매를 견디지 못하여 모두 승복하였다. -후략. 태종 8년 무자(1408) 12월9일(임오)

상징적인 미래예지 꿈으로, 꿈속에 칠성(七星) 중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인물인 성석린의 결정적인 구명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성석린을 극진히 받들어 모시게 될 것을 예지하고 있다.

맹사성이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을 국문하게 된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종 8년 무자(1408년) 11월7일에 맹사성을 대사헌으로 하는 등 헌부의 관리를 새로 임명하였으며, 한달 뒤인 12월5일(무인)에 ‘목인해가 평양군 조대림이 모반한다고 무함하다’, 다음날인 12월6일(기묘)에 ‘사간원에서 조대림이 도성 안에서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핵문(劾問)하다’로 나와 있다.

그러나 다음 해인 태종 9년 기축(1409)년 4월2일(갑술)의 ‘조대림의 병권을 회수하자고 상소한 유사눌 등 대간들을 국문하여 유배를 보냈다’에서 알 수 있듯이, 태종이 부마인 조대림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와 지원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대림(1387∼1430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조준의 아들이며, 태종의 부마로 둘째딸 경정공주와 혼인하였다. 1408년 12월 반란자 목인해의 꾐에 빠져 도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가, 순군사에 감금되었으나, 왕의 부마로서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필자 소개:춘천기계공고 국어교사, 한라대 강사, 꿈해몽전문가, 문학박사(단국대 한문학)‘파자이야기’, ‘꿈해몽백과(공저)’ 등 8권이 있으며, ‘홍순래박사 꿈해몽’(https://984.co.kr, 984+접속버튼)의 유무선 사이트를 통해 꿈에 대한 연구와 정리를 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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