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인물 한국사]27.어물전 장사꾼들 장희빈에게 올인하다!②

일러스트|박은경기자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에 얽힌 오해와 진실을 계속 풀어보자. 이 오해와 진실을 풀어야 이야기 진도 나갈 수 있다. 오해와 진실의 마지막은 과연 장희빈이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랐냐는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보면,

“인현왕후는 역시 명문가 자식이라 그런지 똑똑하고, 예의 바른데… 장희빈 저건 없는 집 자식이라 그런지 애가 표독스러워…”

이런 분위기다. 과연 그럴까? 장희빈은 없는 집 자식일까? 일단 장희빈의 출생을 더듬어 가보자.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張炯)은 안동 장씨 집안이다. 안동 장씨… 지금으로 치면, 삼성과 현대, LG 같은 재벌 가문이었다. 중인 신분이긴 하지만,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명문가였다(조선시대 20여명의 역관을 배출했으며, 이들 중 7명은 역과 수석을 차지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두각을 보인 안동 장씨 집안은 이후 웬만한 양반가문이 넘볼 수 없는 재력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조선 후기가 되면 역관들의 영향력은 웬만한 양반가들을 압도하게 된다. 이유는 바로 그들의 경제력과 외교력 때문이었다. 일단 경제력 부분만 따져보면,

“이번에 가면 뭐 사올 거야?”

“글쎄… 이번에는 비단실을 좀 사올까 하는데… 쪽바리 놈들이 요즘 비단에 환장했다는데, 그걸로 장사 좀 해보려고.”

당시 조정은 역관들의 사행길에 출장비 대신 무역 허가권을 주게 된다.

“출장비는 못 주겠고, 대신에 사무역 허가권 줄 테니까… 일 잘하고 와라.”

“예…”

“어쭈, 떫은 표정이다? 차라리 출장비를 줄까?”

“아… 아닙니다. 허가권이 더 좋슴다.”

이렇게 해서 역관들은 인삼 80근이나 은 2천 냥 한도 내에서 사무역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이 허가권 덕분에 떼돈을 만지게 된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출발 할 때 인삼을 들고 가 팔고, 이 판 돈으로 중국에서 비단이나 책등을 수입한다. 그런 다음 이걸 다시 조선이나 일본에 팔면 몇 곱절의 이익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허생전에 나오는 변승업도 이렇게 하여 떼돈을 번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역관들의 외교력도 그들의 신분을 상승 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어 주었다. 당시 청나라와의 미묘한 외교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관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외국어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수많은 중국 사행길을 통해 얻은 국제 감각과 탁월한 정세파악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러다 보니 역관들의 위상은 조선 후기로 가면 양반들을 위협하게 된다. 중인이었던 장옥정이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장희빈과 안동 장씨 가문에 집중해 보자.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은 천민신분인 윤씨와의 사이에서 장희빈을 낳게 된다. 장형 역시 역관이라(사역원 부봉사였었다. 후에 장희빈이 경종을 낳자 영의정으로 추존된다) 나름 윤택한 생활을 했을 법 한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게 된다. 그리고 이들 장희빈 일가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는 것이 장희빈의 5촌 당숙이 되는 장현(張炫)이었다. 장현… 이 사람 안동 장씨 가문의 슈퍼스타이자. 남인 세력의 물주였었다. 이 사람의 이력을 잠깐 살펴보면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데,

“젊었을 때? 뭐 한 게 있어야지. 그때 소현세자랑 봉림대군이 코 찔찔 흘릴 때였거든? 그때 내가 얘네들 데리고 심양에 갔었잖아. 가서 6년 동안 얘네들 보살피느라 아주 피똥을 쌌지… 돌아와서? 돌아오니까, 소현세자가 죽더구만… 그래서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고, 그래도 봉림대군이 의리하나는 있었거든, 딱 날 부르더니, 나보고 무역권을 준다잖아. 뭐 주고 싶으면 주시든가 했지. 좀 있다 보니까, 북벌을 한다네? 나보고 군수물자를 취급 하라더만… 알았다고 했지. 그 다음부터는 군수품을 주로 밀무역 했었지… 밀수 아니냐고? 이 사람이… 지금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데, 밀수면 어떻고, 이면거래면 어때?”

장현 끗발하나는 끝내줬다. 문제는 장현의 정치적 성형이었다. 장현은 남인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그 친밀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숙종 초까지 남인과 장현은 신이 났었다. 정권은 남인 수중에 있었고, 장현은 여전히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에 터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이들의 끗발 날리던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장현도 유배를 가게 된다). 물주가 이렇게 되니 장희빈 집안도 온전 할리 없었다. 여기서 장희빈과 남인의 ‘숙종 꼬시기’작전이 들어간 것이다.

“야, 네 얼굴이면 그냥 게임 끝이야. 전하가 좀 까탈스럽긴 하지만 너 정도면 그냥 먹어 줄 거야. 네가 우리 남인 좀 살려줘라.”

때마침 중전이었던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은 뒤였기에 남인들은 장희빈을 구원투수로 남인세력을 부활시키려 했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인현왕후보다는 장희빈에게 더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장희빈은 숙종을 꼬셔야 된다는 절대 명제 앞에서 궁녀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노력파였다는 점이다. 반면, 인현왕후는 집안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명문 여흥 민씨 출신에다가, 아버지는 서인 세력의 핵심이었던 호조판서 민유중이었다) 간택절차도 없이 낙하산으로 중전이 됐었다. 노력파와 낙하산의 싸움! 그러나 이 두 여자의 싸움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단순한 처첩갈등이 아니었다. 정권이 걸려있었던 정쟁의 최첨단이기도 하였으며…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선 상계(商界)의 패권을 둘러싼 경제 전쟁이기도 하였으니…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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