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인물 한국사]32.응가가 굵어 왕비가 된 여자?②

일러스트|강역민기자

신의 과도한 축복(?)을 받아 일반 성인남성 사이즈보다 몇 배나 큰 음경을 갖고 태어난 지증왕! 남들보다 큰 건 좋은데, 너무 컸다는 게 문제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지증왕은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여자를 찾아오라고 명령하게 된다.

“왕씩이나 되는 놈이 밤마다 미스 수(手)랑 놀아야겠냐? 마, 이런 건 말 나오기 전에 네들이 해결해야 할 거 아냐?”

지증왕의 닦달에 신하들은 온 신라 땅을 헤집고 돌아가는데… 그런 어느 날 지증왕의 신부를 찾아 나선 사신 하나가 모량부에 도착해 겨우 숨을 돌리는데, 못 볼꼴을 보게 된다.

“저…저게 뭐야?”

큰 개 두 마리가 큰북만한 똥을 물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것이 아닌가? 똥 때문에 싸우는 걸 보니 똥개인건 분명한데, 문제는 그 똥의 사이즈였다.

“저런 사이즈의 응가면… 변빈가? 아니 변비라도 그렇지, 완전 상식 밖의 사이즈잖아. 어… 상식 밖의 사이즈?”

이 사신은 이 응가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이 정도 사이즈의 응가를 생산해 낸 사람이 만약 여자라면, 왕과의 사이즈도 맞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동네 꼬마가 이 거대응가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 저 빅똥이요?”

“야야, 이게 햄버거냐? 말을 해도 빅똥이 뭐냐? 거대응가나… 대변이라든가…”

“똥보고 똥이라는데, 왜 그래요?”

“알았어. 알았다치구, 누가 싼 거냐?”

“저 빅똥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몰래 숲에 들어가 싼 거거든요?”

“…야 너 그걸 어떻게 알았냐?”

어떻게 안게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여하튼 이 사신은 그길로 이 빅똥의 주인공이 사는 모량부 상공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7자5치(지금 기준으로 2미터 20센티미터 정도)의 거대 여인이었다.

“하승진이다!”

하승진을 뽑은 허재 감독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사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여인을 왕에게 끌고 가게 된다. 이 여인이 바로 지증왕의 부인이 되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음경이 너무 커 결혼을 못하다 결국 빅똥을 싸는 2미터 20센티미터 여자를 만나 결혼한 지증왕…. 우리나라 역사상 응가가 굵어 왕비가 된 여자는 이 여자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왕비가 좋다지만, 응가가 굵어 왕비가 되었다가 기록에 남는다면… 기분이 좋을까? 의문이 드는 점이란 게 응가가 굵다면, 보통 항문이 크겠다는 생각을 하지 음문이 크다는 생각은 하지는 않잖은가? 설마 지증왕은… 변태 성욕자?

여기까지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더듬어 본 이야기이다.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삼국유사이지만… 행간을 잘 읽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러브스토리(?)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슨 의미냐구? 지증왕의 거대 음경과 연제부인의 빅똥 이야기는 구라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일단 지증왕이 보위에 오른 뒤에 이들이 만났다는 설정 자체가 무리가 따른다.

지증왕이 태어난 해가 서기 437년이다. 왕위에 오른 해는 여기서 한참 지나 세기가 바뀌기 바로 직전인 서기 500년의 일이다. 환갑, 진갑 다 지난 60대에 왕위에 올랐다는 소리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정력이 절륜하다 해도 나이 60이 넘은 할아버지가 그렇게 여자를 밝히겠는가? 이렇게 밝히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연제부인은 왕위에 오르게 전에 결혼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그의 아들 원종(原宗 : 신라 23대 법흥왕)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기 514년 왕위를 이어받은 법흥왕은 아버지가 남긴 ‘신라 근대화’란 시대적 사명을 위해 분골쇄신하게 된다(법흥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즉위하자마자 가열 찬 개혁드라이브를 건 것을 보면,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뒤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어째서 지증왕의 ‘대물설’이 튀어 나왔던 것일까? 가장 유력한 답은 아마도 그의 평범하지 않은 왕위계승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촌수로 따지면, 소지왕(炤知王)의 6촌 동생이 되는 지증왕…. 당연히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생도 아니고, 사촌도 아니고, 6촌이라니….(소지왕이 후계자로 지증왕을 선택한 이유는 유추가 가능한데, 바로 지증왕의 아들 원종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소지왕의 딸이 원종에게 시집을 갔었다) 결국 지증왕은 자신의 왕위승계의 정당성과 적법성을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의 성기 사이즈는 곧 그 사람의 남성성과 능력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로 지증왕은 자신의 사이즈를 확대 포장했을 개연성이 높다. 따지고 보면, 지증왕도 참 못할 짓을 했던 것이다. 환갑진갑 다 넘은 나이에 자기 물건 크다고 선전하고 다녀야 했다니…. 그래도 지증왕은 나은 편이다. 그 부인은 무슨 죄인가? 멀쩡히 결혼해 잘 살았는데, 삼국유사에 ‘응가가 굵어 왕비가 된 여자’로 기록되다니…. 역사에는 이런 말 못할 피해자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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