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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야 말레츠키의 달링코리아](25) 한국과 독일 ‘분단의 차이’

틈틈이 독일에서 전화가 온다. 내용인즉 뉴스에서 북한 어쩌고저쩌고했다고 하는데 미르야, 괜찮니? 다시 집에 안 와도 돼? 한국에서 분위기 어때?

그런데 보통 나는 그런 뉴스를 듣지도 못했고 길에서도 어떤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느끼지지도 않는다. 역시 밖에서 보면 심각한 상황일지 몰라도 매일 그 속에서 살아간다면 심각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 독일도 그랬다.

우리 외할머니는 베를린 장벽이 생겼을 때 자신의 고향인 카를마르크스슈타트(통일 후의 켐니츠)에서 서독으로 피란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동독쪽 친척이 많다. 요즘은 언제든지 서로 방문할 수도 있고 마음만 있으면 통화도 편하게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연락하기 어려웠지만 그땐 그냥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동갑인 내 친척(우리 엄마 사촌언니의 아들)과 연락하고 싶을 때면 몇 시간 동안 계속 전화 걸었다. 운 좋으면 신호가 나온다. 그리고 신청하면 몇년에 한번 방문하러 갈 수도 있었다. 우리 외할머니는 친오빠가 아직 그쪽에 살고 있어서 언제든지 동독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와 나는 유일하게 친척 큰 행사(결혼이나 장례식)가 있을 때만 방문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참 신기했다.

우선 국경 넘는 것부터 문제가 많았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잘 몰랐지만 외할머니는 어린 내가 심심할까봐 아동 테이프 하나를 가방에 숨겨서 들고 가셨다. 다행히 국경 넘을 때 군인들이 눈치 못 챘지만 걸렸으면 큰일 났을 것이다. 동독으로 갈 때 책이나 테이프 같은 것은 자유롭게 들고 갈 수 없다. 서독의 사고방식이나 신념이 퍼지는 것을 동독 정부가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때 걸렸으면 우리 모두 다 바로 감옥에 갔었을 것이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일부 동독인들은 서독 방송을 시청하는 것 같았지만 워낙 비밀스러워서 확실한 증거를 잡지는 못했다. 보통 TV뉴스를 방송하기 전 카운트다운을 위해 수초간 큰 시계를 보여줬다. 그래서 어느 날 동독의 유치원 선생님들이 아이들한테 “뉴스의 시계” 그려보라고 했다. 그 결과 아이들의 80% 정도 서독의 뉴스 시계를 그렸다.

통일된 그날은 제대로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통일 다음날 친척과 통화하는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얼마 뒤 외할머니한테 호출받는 날. 통일이 된 지 얼마 안 됐고 크리스마스가 지난 직후였다. 우리는 당시 브레멘에 살고 있었고 외할머니는 1시간 정도 떨어진 함부르크에 사셨다. 보통 주말에 많이 놀러갔는데 평일에 호출을 받으니 얼떨떨했다. 외할머니집 복도에 들어오니 옆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우리 친척 형제들이 부모님과 함께 온 것이 아닌가. 좋은 일인데 우리 모두 울음이 터졌다. 결국에 친척과 우리 집에 함께 머물면서 함께 새해를 보냈다. 우리는 친척집에 많이 갔었지만 친척에게 우리 집을 보여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늘 칼럼을 ‘나만의 통일’로 쓰는 걸로 결정했을 때 다른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냥 사실 있는 그대로 쓰면 통일이 아직 안 된 한국 독자들에게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 쓰는 중에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났다. 통일됐을 때 나는 만 12살이었고 깊은 의미도 이해 못했지만 기억과 그날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도 빨리 통일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독과 서독은 서로 왕래할 수 있어서 이해의 폭이 넓었지만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한국의 통일이 더 오래 걸리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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