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인물 한국사]44. 열녀에도 등급이 있다?②

성종 25년(1494년) 2월….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서 한 장! 과부 옥금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에 조정은 나름 감동을 받게 되었으니….

“이건 그 동안 전하가 가열차게 추진하신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 : 성종 16년에 시행된 법으로, 재가한 여성의 자식들의 관직 진출을 통제했던 법이다. 이 법으로 말미암아 성종 16년 이전까지 자유롭던 여성들의 재혼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조선시대 여성 억압을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악법)의 효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전하 감축드립니다!”

“뭘 내가… 하긴, 힘들긴 힘들었지? 막장인생 어우동(於于同)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났었는데, 그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어우동 혹은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고 했던 여인…. 세종 9년에 있었던 유감동 사건과 함께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을 일으켰던 여인이었다(유감동은 밝혀진 남성만 39명이었는데, 어우동은 50여명이 넘었으니, 어우동이 한 수 위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 종실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간 어우동은 한마디로 말해 사회지도층 인사의 부인이었다. 문제는 이 여자가 좀 많이 ‘밝혔다’는 점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원나잇 스탠드를 즐겼다고 해야 할까? 길가다 눈 맞으면, 아무나 붙잡고 무릎과 무릎 사이를 찍었는데, 그 대상이 근친이든 족친이든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아줌마가… 지금 제 정신이야? 육촌 시아주버니인 방산수(方山守) 이난,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守山守) 이기? 지금 개족보를 만들려고 작정을 했어?”

결국 남편 이동에게 소박을 맞은 어우동이었지만, 어우동은 오히려 소박맞은 걸 좋아했으니….

“위기가 곧 기회이고,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았어? 이 참에 그 동안 못했던 원나잇이나 실컷 해보자.”

이리하여 어우동은 아무나 붙잡고(그래도 나름 보는 눈은 있어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주로 상대했지만, 간간히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도 시선을 돌렸다),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그 명단을 살펴보면, 전의감 생도 박강창, 서리 감의동, 병조판서 어유소, 직제학 노공필, 아전 오종연, 과거 합격생 홍찬 등등. 어우동이 상대한 남성들은 참으로 다종다양했었다.

“이건, 어우동의 모함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우동 쇼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스탠드바나 카바레 같은 데를 가 본 적이 없슴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해? 어우동 쇼가 여기서 왜 나와?”

당시 어우동이 지목했던 고위 관료들은 발뺌하기 급급했다. 문제는 어우동의 신분이었다. 그냥저냥 일반 상민 계층의 여자가 이리저리 몸을 막 굴렸다면, ‘좀 밝히는 여자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어우동의 경우는 달랐다. 양반가의 딸로서, 종실이었던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간 말 ‘종실 가문 며느리’ 출신이었던 것이다. 정4품 혜인(惠人)의 품작까지 받은 어우동의 족보는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손윗 형님 되는 효령대군의 손주며느리가 되는 것이었다. 왕실로서는 개망신이었다는 것이다.

“야야, 더 이상 이 사건 끌었다가는 나라 망신에, 왕실 망신이야. 후딱 죽여 버려!”

“맞슴다! 맘에 들면 같이 자고… 더 마음에 들면, 몸에다가 이름까지 문신했다는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슴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딸도 하나 낳았답니다. 막장 오브 막장입니다. 무조건 목을 따야 합니다!”

사건의 확산을 두려워 한 조정과 왕실은 서둘러 어우동을 처형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키게 된다. 문제는 이 사건이 성종에게 끼친 영향이었다.

“아니 쉬파, 숭유억불을 기본 컨셉트로 만든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막장 아줌마가 튀어 나올 수 있어? 유감동이야… 그래, 나라 세운지 얼마 안됐으니까 튀어나왔다 할 수 있지만, 이건 아니잖아!”

얼떨결에 왕이 되었던 성종이었기에(당시 왕위 승계순위 3순위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었다), 나름의 콤플렉스가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였던 것 또한 성종이었다. 당시 신하들은 도학(道學 : 성리학)으로 무장한 완벽한 성군의 출현이라며 기뻐했다(기뻐할 만 했다.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성종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애들 모아서 국풍(國風) 축제를 벌이던가 해야지. 뭐가 이렇게 지저분해? 당장 여자애들 단속부터 시작해야지.”

이리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사랑 하나만은 끔찍했던 이 땅의 어머니들…. 자식의 출세가 자신 때문에 원천적으로 봉쇄된다는데, 쉽게 재혼을 결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개중에 자식보다 자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도 있었지만, 이럴 경우에는 가문의 압박이 들어왔다.

“야! 너 살겠다고, 우리 가문을 박살내려고? 너 때문에 우리 집안 애들 과거 응시 못하면 어쩌라고?”

과거급제가 곧 출세와 가문의 부흥을 말했던 조선시대! 재혼하겠다는 여성은 말 그대로 ‘가문의 적’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여성탄압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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