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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의 아메리카브레이크]‘007’ 브로스넌의 순애보

미국엔 ‘할리우드 결혼’(Hollywood marriage)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할리우드 유명인들끼리의 결혼을 뜻하지만, 그 이상의 부정적 뜻이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휘황찬란하고 떠들썩한 연애담과 결혼식, 그리고 몇 년 못가서 벌어지는 이혼 다툼과 파경,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언론의 과열 취재경쟁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남들의 주목을 받는 스타들이다보니 결혼식 과정에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다보니 일반인들보다 이혼 및 파경률이 훨씬 높은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흔히 ‘동화속 결혼’(fairy tale marriage)과는 정반대 뜻으로 쓰인다.

영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유명한 영화배우 피어스 브로스넌(사진)은 ‘할리우드 결혼’의 드문 예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초보 배우 시절이던 1974년 같은 영화배우인 카산드라 해리스와 처음 만나 6년간의 열애 끝에 1980년 결혼했다.

당시 무명이었던 그와 달리 카산드라는 유명배우 리처드 해리스(‘해리 포터’의 덤블도어 역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의 친척이었고, 남편보다 먼저 ‘007 유어 아이즈 온리’에 출연한 ‘본드걸’ 출신 배우였다. 그녀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해 두 아이가 있었지만, 브로스넌은 그런 점에 개의치 않았다. 결혼 초창기 할부금을 낼 돈이 없어 집을 차압당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의 ‘007’ 출연료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로스넌은 다음해인 1982년 인기 TV드라마 ‘레밍턴 스틸’에 출연하면서 인기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드라마 레밍턴 스틸에서 바람둥이 사립탐정이나 영화 007에서 호색한 첩보원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언제나 아내에게 충실한 잉꼬부부로 유명했다.

그러나 결혼 7년 만에 두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아내 카산드라가 자궁암에 걸린 것이다. 브로스넌은 당시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로서 배우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젊은 여배우가 암에 걸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른다. 배우자가 암에 걸리는 순간 온 가족의 삶이 변한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약물치료를 받는 아내의 첫번째 모습을 보면서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가 반복될수록 그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1991년 카산드라는 4년간의 투병 끝에 남편 브로스넌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카산드라가 43세 때, 두사람의 결혼 11주년 기념일에서 정확히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브로스넌은 “아내는 마지막까지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려 했다. 가끔씩 아이들의 얼굴 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아내의 죽음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게 된다”고 회상했다. 브로스넌은 자신의 아이 1명 이외에도, 아내가 남긴 배다른 자식 둘을 함께 길렀다. 이후 ‘007’의 제임스 본드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브로스넌에게는 그런 아픔이 있었다.

영화배우 장진영씨가 암으로 투병하다 향년 37세로 운명했다. 지난해 9월 위암 선고를 받은 후 1년 동안 투병했다고 한다. 운명하기 4일전 그녀의 남자친구가 혼인신고를 했다고 해서 세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젊고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병마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이나 할리우드 영화배우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험난한 투병생활을 함께 할 수 있었던 배우자가 있었던 것만으로도 뜻있고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재미 언론인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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