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이 사람]한국 정착日 초밥 명인 마쓰도 토시오씨

“최상의 재료 찾아 발품, 한국지리 훤하죠”

만화 ‘초밥왕’의 인기는 한국인에게 초밥의 진가를 알게 했다. 하지만 음식이 경계를 넘으면문화의 토양따라 퓨전의 길을 걷듯, 초밥 본래의 맛을 알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일본 초밥 장인 중 한명인 마쓰도 토시오씨(松戶利雄·63)가 한국에서 초밥의 참 맛을 전하고있다. 얼마전 동원양반김 CF를 통해 얼굴을 알린 이가 그다. 일본 초밥 명인이 한국에 정착한 이유는 뭘까?

초밥 명인 마쓰도 토시오가 자신이 셰프로 있는 청담동 ‘스시유’에서 정성스레 초밥을 만들고 있다. 그는 “오늘을 있게 한 것은 노력이며, 43년 똑같은 일상의 노동을 버텨내기 위해 20년전부터 가라테 등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꿈을 꾸기 위해 잠을 포기하다

꼭 40년전이다. 마쓰도 토시오가 전국 요리 경연대회에서 처음으로 최고의 요리사에 뽑힌 것은 23살때였다. 19살 나이에 식당 ‘알바’로 시작한 신출내기 요리사가 경력이 겨우 5년이 될까말까한, 요리사란 명함조차 내밀기 부끄러울 때에 최고의 요리사란 타이틀을 거머 쥔 것이다.

“TV에서 일본 전국을 대상으로 최고의 요리사를 뽑는 경연을 벌였어요. 전국에서 875명의 주방장이 모였고, 그 중 7명 만을 선정해 최고의 요리사란 자격을 줬죠. 그렇게 최고 중의 최고를 뽑는 대회에서 내가 뽑힌 거예요. 그 당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

그가 경연대회에서 최고의 요리사로 뽑힐 당시에도 여전히 주 업무는 셰프(총주방장)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년 마쓰도는 설겆이부터 홀서빙, 배달과 청소일을 갓 졸업한 말그대로 초보 요리사였다.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 그에게 이 대회 우승은 더 높은 꿈을 꾸게 했다. 마쓰도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잠을 포기했다. 이후 5년간 하루 3시간 남짓 자면서 일 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동안 쉰 날도 단 하루 뿐이었다. 도제식으로 운영되던 당시 일본의 주방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두손두발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손님에게 오차를 낼 때도 정확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한시도 쉴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틈틈이 선배들 점심도 챙겨야 했죠. 지금은 추억이지만 당시는 고역 그 자체였어요. 다른 사람들 챙기다보면 막상 내가 먹을 밥은 없어서 빵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어요. 그렇게 배워서 처음 만든 제 작품이 치라시동(생선덮밥)과 마키(김말이)였습니다.”

결국 그는 점심을 챙겨주던 선배들을 제치고 27세의 나이에 일본 내 최고 일식점 셰프로 올라섰다.

▨ 선생님의 꿈, 초밥의 스승으로 끝내 이루다

마쓰도 셰프의 첫 주방은 72년 전통의 일본 최고의 초밥집인 ‘스시큐베이’였다. 그 곳에서 초밥 장인의 명성을 쌓은 후 중국 상하이 리츠칼튼호텔 총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콩에서는 ‘스시 도코로 마쓰도’의 오너 셰프로 근무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일본 정통 초밥을 소개해 왔다. 마침 일식이 지구촌 사람들의 입맛을 잡기 시작한 때라 수많은 해외언론으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초밥왕답게 자신만의 초밥 만들기 3단계 공정도 개발했다. 오른손으로 밥을 만들고 왼손으로 모양을 다듬는 한국식 스타일과 달리 마쓰도의 초밥은 오른손으로는 밥을 쥐기만 하고(1단계), 왼손으로 생선을 올려(2단계), 고객 앞에 선보이는(3단계) 것이다. 이 과정이 3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만들면 밥알이 뭉치지 않아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풀어져 더욱 부드러운 맛이 난다”고 말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와의 일화도 소개했다.

“1990년대 말 하시모토 전 총리가 직접 연락을 해 총리관저에서 며칠 동안 초밥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초밥을 맛본 하시모토 전 총리는 ‘내 인생 최고의 초밥’이라고 극찬을 해 나도깜짝 놀랐어요. 총리의 말은 내 인생에 대한 최고의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

그의 명성은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자자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직 당시 주최한 4000명 규모의 연회장에 초밥을 올리기 위해 미국 댈러스까지 직접 건너갔다. ‘초밥왕’ 마쓰도에 대한 찬사는 이어졌고, 명성은 더해갔다.

1949년 지바현에서 태어나 한때 선생님을 꿈꾸던 가난한 청년의 꿈은 결국 초밥의 최고 권위자가 되면서 바둑으로 치자면 ‘입신’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 넌, 네게 반했어… 마쓰도와 한국인 서로서로

중국 상하이, 홍콩, 미국 등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진가를 알린 그가 돌연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뭘까? 이제 초밥의 맛을 이해하기 시작한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일식집을 운영할 당시 고객 대부분이 거주 또는 업무상 목적으로 홍콩을 방문한 한국인이었어요. 그 당시 제 생각으로는 일식은 일본인들만의 음식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본인보다 더 일식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한국인 고객의 적극적인 권유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하지만 한국에 와보니 적지 않은 일식집이 있어서 놀랐다고.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일본에 가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일본 최고의 초밥 요리’였다. 청담동의 ‘스시유’가 그 곳이다.메뉴는 물론 서비스까지 일본의 최고급 일식집을 그대로 옮겨왔다. 실제 그 귀하다는 비젠야키(명품 도자기)부터 각종 식기, 인테리어, 소품 하나까지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 와서 스시유에 ‘빌트 인’했다. 그렇게 해서 마쓰도는 2008년 한국에 정착했다. 아직 일본으로 떠날 계획은 없다.

그의 초밥은 일본에서도 가장 대중적이며 최고로 꼽히는 ‘에도마에 스시’다. 에도마에는 도쿄를 의미한다. 풍미가 강한 간토요리(이 역시 도쿄를 중심으로 한 요리) 전통 조리법을 따라 하며 주로 간장으로 맛을 낸다. 사케도 무려 최고급의 100가지가 종류별로 완비돼 있다.그렇다고 가치를 가격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런 주관은 점심 메뉴 가격이 3만~5만원으로 구성돼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특상 ‘모듬스시’가 8만원 정도다. 그는 식재료를 구하기위해서 돌아다니다가 한국 지리를 다 꿰찼다. 식재료는 당연히 최고 좋은 것으로 쓴다. 이를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 전국의 수산시장을 돈다. 노량진·가락시장은 물론 부산 자갈치시장까지 갈 정도다.

그의 초밥 만드는 철학은 ‘손이 아닌 마음으로 만드는 것’. 이를 되새겨보면 그가 한국에 정착한 이유도 얼추 이해된다. 한국인이 그의 초밥 맛에 반했듯, 마쓰도는 한국인의 마음에 반한 것은 아닐까?

“진정한 셰프라면 훌륭한 후배 키워야”

셰프 마쓰도 토시오가 갖고 있는 셰프론의 핵심은 ‘교육’이다. 그는 “진정한 셰프는 단지 음식을 잘 만드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후배를 많이 길러내는 교육자로서의 몫도 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초보 요리사에게는 ‘배우려는 마음가짐’이, 셰프에게는 본인의 노하우를 꽁꽁 숨기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큰 마음이 필요하다는 본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맛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최고가 됐고, 세계를 유랑하듯 돌며 초밥을 알린 ‘대인배’ 마쓰도의 인생 철학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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