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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뮤지컬 감독 이욱현 “뽕짝 뮤지컬로 세계무대 도전할 것”

성악가·영화음악 감독 거쳐 뮤지컬 감독 변신

‘두사부일체’ 오케스트라로 OST 만들어 화제

“뮤지컬 첫 작품 ‘군수선거’ 한국적 정서로 승부”

터닝포인트도 자주 찍다보면 그건 ‘그냥’ 변곡점이다. 지켜보는 사람에겐 그저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고, 좋게 말해 그의 인생사는 ‘역마살’ 쯤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뮤지컬 제작자로 변신을 꿈꾸는 이욱현씨(41)를 만나게 되면, 그게 ‘그냥’ 변곡점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변신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고, 이뤄놓은 성과에는 찬사가 여운으로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 유학까지 한 성악도가, ‘히트작’ 일색인 영화음악 감독을 거쳐, 결국에는  ‘뽕짝 뮤지컬’에 꽂히기까지에는 분명 그의 삶을 휘저은 뭔가가 있어 보였다. 

# 대중예술에 눈뜬 이영훈과의 만남

미모의 여인에게 꼬리처럼 따라붙는 것은 ‘얼굴값’이란 비아냥이다. 이를 빗대 문화적인 변신을 거듭한 덕에 문화인이란 통칭이 가능한 이력을 가진 이욱현씨를 평하자면, ‘머릿값’이란 단어다.

서울예고 시절 빼어난 음색으로 호주 퀸즐랜드 학장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성악 유학을 떠난 이씨는 1989년 퀸즐랜드 주립음악원 장학생이 되어 순탄한 음악 인생을 시작한다. 호주·영국·이탈리아 등에서 보낸 7년간의 유학 생활은 그를 전도유망한 성악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유학 등으로 음악적인 입지를 굳혀갈 즈음, 오페라 무대에서 연기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터닝포인트를 한번 찍는다. 그는 연기와 연출을 전공하기 위해 1994년 베네치아 트레비소 국립연극원에 들어간다. 호기 있게 무대에 섰던 오페라 <토스카>에서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조기 유학 학생들이 흔히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 머리가 커오면서 그의 유학생활을 옥죄기 시작했던 것.

“고교생이 유학을 가다보니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게 많은 거예요. 이러다가 한국 사람이 안되겠다 싶어서 유럽생활 7년 만에 짐을 꾸렸어요.”

이씨에게는 귀국이 오히려 엑소더스였다. 그가 한국에서 숨어든 곳은 대학로 연극무대였다. 그곳에서 귀인을 만났다. 대중음악계의 거목 고 이영훈이다.

“IT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스티브 잡스를 만난 것처럼, 신인배우가 이순재 선생님을 만난 것과 같은 일이란 생각입니다. 1996년 한국에 돌아와 작은 극단에서 단역으로 포스터도 붙이고, 음악도 만들고 출연도 하던 때였죠. 제 연극을 보러왔던 이영훈 선생님이 연극의 음악을 듣고 저를 픽업한 셈이에요.”

혹시 사기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영훈 작곡가 사무실로 찾아간 그는 책장에 꽂힌 가수 이문세의 앨범과 먼지 쌓인 글든디스크 트로피를 보고 그만 ‘얼음땡’이 됐다고 말한다. 대중음악적 영감이 일취월장한 출발점이었다.

이씨가 이영훈 작곡가에게서 배운 것은 ‘음악적인 완성도’였다. 한번은 수십명의 연주자들이 모였지만, 자신이 악보를 챙기지 못한 탓에 연주를 진행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영훈씨는 그 자리에서 연주자를 모두 돌려보내면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 연주자에게 실수해서 쉽게 보이면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고 그를 꾸짖었다. 당시 그 실수로 2000만원이라는 거금이 날아갔다.

# 주먹대장을 돌려세운 가족의 힘

돌아보면 그에게는 여러 명의 선생님이 있었다. 터닝포인트마다 인생의 안내자들이 엇나가려는 그의 삶을 붙잡았다. 중학생 욱현이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다. 판자촌 삶 속에서 자식 교육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던 어머니와 어릴 적 사고로 몸이 불편해진 형이 체육시간에 뛰노는 동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의 삶을 지켜냈고, 신체적 한계에도 형은 의사로 누구보다 열심히 불편한 세상에서 날아올랐다.

사실 어린 욱현이는 ‘주먹질’로 인생의 서막을 열었다. 지금이야 얼굴에 함박 미소를 달고 살지만, 청년이란 패기에 시쳇말로 ‘양악수술’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는 인상적인 얼굴 생김새는 눈빛을 마주친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기 충분한 외모였다. 당시 중학생 욱현이는 그렇게 권투와 가출로 얼룩진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너무 싸우다 보니 사고치는 것이 식상해졌다는 것이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 이론처럼 ‘컴백홈’을 외치며 집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런 그를 어머니와 형이 그의 일탈된 삶을 막아섰다.

“중3 때는 공부 좀 했어요. 실력이 없다보니 책을 외웠죠. 그리고 지원한 곳이 우리 학교 1등이 지원한 학교였죠. 58명의 반 친구 중 56등인 제가 그 학교에 지원했으니, 웃음거리가 됐지만 결국 저는 합격하고 그 친구는 고배를 마셨어요. 매일 코피를 쏟으며 공부한 덕에 연합고사에서 200점 만점에 196점을 맞았어요. 그때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얻었죠.”

유학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 인생의 멘토 이영훈이란 자양분에 고양된 그의 음악적 재주는 영화 음악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는다. 영화 <신장개업> <두사부일체> <홍반장> <해바라기> <동감> <실종> 등을 거치며 영화음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사실 노림수가 있었어요. 우선 작품 선택의 기준인데,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를 우선 순위로 뒀습니다. 그렇다고 막 만들지는 않았어요. 히트작이 된 <두사부일체>의 경우 당시만 해도 조폭코미디에는 록이나 펑크를 쓰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기였지만, 오케스트라를 쓰는 모험을 강행해 성공했죠.”

#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

이 영화 이후 그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그러나 그는 또 짐을 꾸렸다. 이번엔 뮤지컬 도전이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뮤지컬은 <군수선거>라는 제목의 작품이에요. 소재는 뽕짝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나라 성인남녀 대부분이 좋아하는 장르죠. 우리나라의 정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트로트계 가수들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한 배우들이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접고 뮤지컬에 뛰어드는 이유는 “대학로에 있는 배우들에게 힘이 돼 주기 위해서”다. 라이선스 공연과 오리지널 투어 공연이 넘쳐나는 우리 뮤지컬 시장에서 우리의 창작 뮤지컬이 성공하는 ‘사고’를 치기 위해서다. 그의 꿈은 한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이씨는 이번 뮤지컬 도전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최대 창작 쇼를 만들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말한다.

“제 작업은 현재진행형이고 제 꿈은 미래진행형입니다. 언제나 제 도전의 시작은 척박했지만,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죠. 이번 뮤지컬 도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유학 생활에서 체험한 해외 공연의 경험과, 한국 대중문화의 밑바닥 정서와 한류를 웅비할 시스템을 확인한 이상 더더욱 뮤지컬 도전을 멈출 수 없습니다. 결국 미래 역시 도전하는 자의 것이니까요.”

이씨의 자신감이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넘치는 자신감과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의 이력 때문이다.

크로스오버의 귀재, 문화계의 이단아로

노래로 시작한 이욱현씨의 목소리는 영화 사운드트랙과 드라마 주제곡으로 적지 않게 숨어 있다. 영화 에서 ‘안젤로’란 예명으로 부른 와 드라마 의 등이 그것이다. 영화음악을 조율하는 그는 ‘마스터’가 되기도 하고, 영화와 드라마의 백그라운드에 숨어 노래를 하는 통에 ‘얼굴없는 가수’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터닝포인트는 ‘크로스오버의 귀재’란 칭송을 받기도 한다. 그의 도전에 긍정의 신호가 엿보이는 것은 무엇보다 주변의 평가가 파란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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