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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의 아메리카브레이크]20년 전 매직 존슨의 ‘발표’

“지금 전해드리는 뉴스는 너무 충격적이고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저희 기자들조차도 보도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1년 11월 7일, ESPN뉴스는 이렇게 시작했다.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HIV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그 때문에 오늘부로 LA레이커스를 은퇴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매직 존슨의 은퇴발표 뉴스다. 12년간 NBA에서 활약하며 5번의 우승, 3번의 MVP 수상 등 역대 최고 선수로 평가받던 그다. 그런데 인기 절정의 순간에 그는 에이즈 감염사실을 발표했다. 농구팬은 물론 전 세계에 충격에 빠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에이즈는 ‘저승행 티켓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자회견 후 20년이 지난 최근, 필자는 미국 언론을 검색하다가 새삼스럽게 놀랐다. 존슨이 LA다저스 인수에 나섰다는 뉴스가 수두룩하게 나왔지만, 그 어느 기사에도 에이즈의 A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는 죽는 병’이라고 여겼지만, 존슨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몸으로 편견을 깼다. 1년, 2년, 10년이 지나도 꾸준하게 노력해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살았다. 존슨의 생존이 에이즈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바꾸고, 환자들의 절망과 차별을 없애는데 공헌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미국사회에서 에이즈는 치료약은 없지만 조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만성질환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에이즈 보균자지만 성공적으로 산다. 은퇴 후 사업가로 성공해 NBA은퇴선수의 롤모델로 꼽히고 있다. 식당, 극장, 체육관을 망라하는 자신의 기업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해 사업에서도 ‘매직’을 선보였다. 특히 흑인 우범지대에 사업을 차려 범죄율을 낮춘 공로로 ‘포브스’가 뽑은 흑인사업가로 뽑혔다.

필자가 매직 존슨의 에이즈 발표를 다시 떠올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매직 존슨이 최근 이 충격적 사건을 스스로 영화로 만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영화제목도 아주 간단하다. ‘발표’(Anouncement)다. 영화 <발표>는 매직 존슨의 농구 실력을 다루지 않는다. 그 충격적 발표 이후 그와 주변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다룬다. 그의 아내 쿠키, 아들 안드레 등 가족을 비롯해 래리 버드, 칼 말론 등이 줄줄이 출연한다. 매직 존슨은 그 발표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발표하는 게 두려웠냐고요. 아뇨, 그건 두렵지 않았어요. 언론? 두렵지 않았어요. 내가 두려웠던 건, ‘내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였죠.”

당시 존슨의 에이즈 감염은 개인 뿐 만 아니라 어쩌면 NBA에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존슨은 솔직히 ‘발표’했고,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매직 존슨 재단과 ESPN이 영화를 공동 제작하고, 오는 3월 ESPN에서 방송한다고 한다.

요즘 한국 스포츠계에도 감추고 싶은, 발표하기 힘든 사건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솔직히 발표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러면 10년~20년 후 영화로 만들 만한 교훈으로 남을지 모른다.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양심을 속이고 도피하는 한때의 한국 스포츠 슈퍼스타를 보며 드는 느낌이다.

<재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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