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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북남’ 현정화, 김국철이 최고 ‘인기’

“처음엔 남의 집에 간 기분이었죠. 그런데 어느새 한 가족이더라고요. 같이 웃고 울고. 최소한 일본 지바에 남북의 구분은 없었습니다.”

이유성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55)은 21년 전 일을 어제처럼 기억한다고 했다. 분단 최초의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중국을 무너뜨렸는데 어찌 잊겠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여자대표팀의 남측 코치로 출전했던 그에게 1991년 4월 29일은 멈춰진 달력이라고도 했다. ‘46일간의 작은 통일’. 그 소중한 추억의 백미를 장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7000만 겨레가 이룬 기적을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 ‘코리아’가 개봉을 앞둔 30일 이 단장을 만나 숨겨진 뒷얘기들을 들어봤다.

이유성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이 30일 경희궁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유순복이 히든카드?…사실은 미봉책

당시 코리아는 10전 전승으로 순조롭게 여자단체전 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전 대회 준우승팀 한국과 5위 북한이 하나로 뭉쳤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문제는 결승전 상대 중국이었다.

“덩야핑·치아홍·가오쥔 등 중국의 벽은 만리장성이라 했어요.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죠.”

중국은 1975년 캘커타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989년 도르트문트 대회까지 세계선수권을 8연패한 철벽이었다. 더군다나 예선에서 승승장구했던 북한의 이분희가 간염으로 결승전 단식을 소화할 수 없어 패색이 뚜렷했다.

“대회 도중에 이분희의 코치(지도원)를 맡은 조남풍 형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분희가 간염에 걸렸다고…. 큰 일났다 싶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파리한 이분희를 위해 초밥이든 뭐든 지극정성으로 사다 먹였어요.”.

하지만 이분희의 컨디션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승전에서는 할 수 없이 이분희 대신 유순복을 출전시켰다. 그런데 유순복이 ‘핑퐁마녀’ 덩야핑과 가오쥔을 차례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순복이가 그렇게 잘 할 줄은 몰랐죠. 마치 기계처럼 탁구를 했어요. 벽에 공을 때리는 것처럼 끝없이 버텼어요. 덩야핑과 가오쥔이 너무 긴장해서 제 풀에 무너지더군요.”

그러나 이분희는 힘을 발휘한 단식에서 당당 준우승을 차지함으로써 명성을 지켰다.

■최고의 인기남은 김국철, 최고의 인기녀는 현정화

코리아에 우승을 안긴 주인공은 유순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큰 인기는 없었다고 했다. 이 단장은 “남남북녀(南男北女)라고 하는데 남북단일팀에서는 정반대였다. 남자는 북한의 김국철이 가장 인기가 많았고, 여자는 현정화가 최고였다. 남녀북남(南女北男)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유남규 남자탁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막내였던 (김)국철이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당시 남북단일팀에 나를 포함해 남자 선수가 6명이 있었는데 사실 국철이는 외모를 보자면 별로였던 선수”라고 말했다.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는 “아니다. 국철이는 숫기가 없는 순박한 외모가 매력적이었다”고 반박하면서 “내가 여자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도 외모 때문”이라고 웃었다. 그러면서 “북한의 남자 선수 중에는 쉴 때마다 내 옆에 꼭 앉는 선수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유성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이 30일 경희궁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정보요원들도 울었다

남북단일팀은 민감한 사안이었다. 자연히 남북이 모두 정보요원을 파견했다. 탁구를 통해 남북교류를 꾀하지만 돌발 사태는 막겠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탁구 외에 사적인 만남은 철저히 가로 막았다. 이 단장이 “선수들과 조금만 친해지려고 해도 제지를 받았다”고 떠올릴 정도다.

그러나 낙숫물이 바윗돌을 뚫는다고 했다. 중국을 꺾고 코리아가 시상대에 오르는 순간 칼 같이 날카롭던 정보요원들도 정을 아는 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세계선수권이 열린 니혼 컨벤션센터에서 조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하나로 뭉친 것처럼 남북의 정보요원들도 코리아의 승리의 환호했고 이별의 눈물을 흘렸다. 이 단장은 그해 5월 6일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헤어질 때를 떠올리며 “북한 보위부 요원이 ‘꼭 건강하라’고 신신당부하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과 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더라. 우리 쪽 정보요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밖에서는 눈물을 참았지만 화장실에서는 울었다”고 말했다.

■아깝게 좌절된 남북 퍼레이드

사실 이별의 장소는 일본 도쿄가 아니었다. 우승 트로피를 갖고 서울에서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가진 뒤 판문점을 통해 평양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남북이 합의한 사안이었다. 중국을 꺾고 정상에 오른 남북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이었던 고 강경대씨가 구타로 숨진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퍼레이드는 남북이 따로 여는 것으로 정리됐다.

“아직 이별의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북측에서 한국에서는 시위가 너무 잦아 위험하다고 반대했어요. 어쩔 수 없이 일본 도쿄에서 헤어졌어요.”

■김성희·이분희 부부의 애틋한 사연

지바신화 이후에도 남북선수단은 통일의 여운을 계속 이어갔다. 이유성씨는 북측 여자코치였던 조남풍씨와 의형제를 맺었다.

“남풍이 형과는 정말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대회기간 중에 둘이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함께 감독(윤상문 감독)을 흉보다가 감독에게 된통 걸린 적도 있고…. 통일이 되면 남풍이 형 노후를 제가 책임진다고 했는데….”

둘은 이후에도 각종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양쪽집안의 대소사와 인생상담까지 풀어 헤쳤다. 하도 ‘우리 남풍이 형’, ‘우리 유성이’ 하는 통에 얼굴도 모르는 양쪽 감독의 부인들도 친동서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 주역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김성희·이분희는 부부가 됐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진성이가 사소한 감기가 문제가 돼 소아마비를 앓게 됐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안타깝고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아들의 장애가 인연이 됐는지 이분희는 장애인 체육회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남편 김성희는 남측으로 치면 철도공사에서 탁구감독직을 맡고 있다. 유순복도 군 팀의 지도자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북 관계가 하루 빨리 정상화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탁구도 다시 남북단일팀으로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일본 지바에서 남북의 구분은 없었다. 최소한 탁구만큼은 남북이 따로 없었으면…. 그것이 나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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