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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그때 그 시절]꺼벙이와 함께 웃고, 독고탁과 함께 꿈을 꾸다

‘만화’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던 시절이 있었다. 70년대 군부정권 시대에 만화를 사회 5대악 중의 하나로 규정, 사전검열과 까다로운 심의로 탄압했다. 만화 안보기 운동과 만화 불태우기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쯤 되니 그 재미있는 만화를 읽는 건 모범생과 거리가 있는 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볼거리가 풍성하지 않던 시절 만화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탐독하던 ‘꿈’이었다. 70년대 만화가게는 꿈을 찍는 사진관이었고, 고단한 세월을 잊게 하는 요지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만화를 탄압하던 그 시절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만화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경향신문 1984년 1월 1일자 - 길창덕

코주부, 라이파이, 짱구박사, 허떨이, 땡이, 꺼벙이, 도깨비감투, 임꺽정, 바람의 파이터, 독고탁, 각시탈, 심술가족…. 그 단어만 들어도 만화 캐릭터가 떠오르고 만화가들이 생각난다면 당신은 필시 만화와 친했던 유소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김용환, 산호, 박기준, 김종래, 임창, 김민, 신동우, 길창덕, 이상무, 방학기, 고우영, 윤승운, 이정문, 허영만…. 그 이름만 들어도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그들은 이제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여학생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민애니, 엄희자, 박수산 등 순정만화가들도 있었다. 그 시절 <새소년>, <새벗>, <소년중앙>, <어깨동무>, <어린이 자유> 등 만화를 연재하던 월간 잡지들은 아이들이 돌려 읽던 필독서였다.

이 작은 지면에서 작은 단칸방에서 먹물로 세상의 꿈을 그렸던 만화가들의 면면을 다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그 캐릭터만 떠올려도 즐거운 몇몇 만화가들의 작품을 되짚어 보자.

■‘꺼벙이’ 길창덕 = 꺼벙이, 꺼실이, 덜렁이, 만복이, 순악질여사 등 길창덕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유쾌하다. 그중에서도 머리에 땜통자국이 선명한 장난꾸러기 꺼벙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캐릭터다. 골목길을 누비면서 온갖 말썽을 부리면서도 마음만은 따뜻했던 꺼벙이는 당대 보통 어린이의 표상이었다. 훗날 김미화가 코미디 프로그램 캐릭터로 부활시켜 유명했던 순악질 여사는 억척스럽고도 따스한 대한민국 아줌마의 상징이었다. 길창덕은 2010년 노환으로 별세했지만 꺼벙이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꺼벙이

■‘삼국지’ 고우영 = 고우영은 곧 한국만화의 역사고, 한국만화의 역사는 곧 고우영이었다. 결코 과언이 아니다. 60년대 말 고우영은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명랑만화를 그렸다. 익살스러운 모습의 박사와 아들의 좌충우돌 모험을 그린 <짱구박사>가 대표적이다. 1972년 <임꺽정> 연재를 필두로 성인 취향 연재만화의 영역을 개척,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 고전의 재해석과 <일지매> 등 창작사극으로 이어갔다.

삼국지

그는 스포츠지에 이들 만화를 연재하면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1975년 <소년>에서 연재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은 남자의 길을 가르쳐준 역작이었다. 만화 작업은 물론 기행문, 도서 삽화 작업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그는 타고난 글쟁이이자, 타고난 그림쟁이였다. 2005년 작고했다.

■‘독고 탁’ 이상무 = 빡빡머리 소년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 70년대 이상무(66)가 창조해낸 독고 탁은 때로는 야구선수로 때로는 가난한 고학생으로 등장하여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줬다. <내 이름은 독고탁>, <비둘기 합창> 등은 훗날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콘텐츠였다. 야구만화 등 테니스, 골프 등을 소재로 한 만화들을 선보이면서 스포츠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독고탁

■‘도깨비 감투’ 신문수 = 전래되어 내려오던 도깨비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도깨비 감투>는 머리에 쓰면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감투를 얻은 소년 혁이와 그 친구들이 벌이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만화적 상상력으로 펼쳐보인 작품이다. 신문수(73)가 창조해낸 로봇 찌빠, 원시소년 똘비 등 그의 만화 속 캐릭터는 어리숙 하지만 유쾌한 반전을 숨긴 인물들이다. 간결한 그림체 속에 한국인 특유의 해학과 유머를 녹여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명랑만화의 반석을 닦은 만화가다.

도깨비감투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 = 요즘 방영되는 소위 퓨전사극들은 방학기(68)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의 작품 <다모 남순이>는 드라마 <다모>로, <바람의 파이터>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일본인 주둔지였던 마산에서 겪은 체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베트남전 등 고난의 시기를 관통한 덕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시대활극을 그려냈다. 생동감 넘치는 서사로 역사 속 민초들의 삶을 다루고, 힘있는 필치의 그림으로 무예인들의 투혼을 담은 남성극화로 인기를 끌었다. 최배달, 역도산, 김두한, 시라소니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주먹들이 방학기 만화의 소재였다. 고우영의 문하생 출신.

바람의파이터

■‘각시탈’ 허영만 = 최근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허영만(65)의 <각시탈>은 70년대 그를 인기만화가 대열에 우뚝 서게한 출세작이었다. 최근에도 <타짜>와 <식객>등 역작을 내놓으면서 한국만화의 현재로 군림하고 있는 허영만이지만 기성세대는 그를 여전히 각시탈의 만화가로 기억한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신출귀몰하면서 일본경찰이나 군인을 조롱하는 각시탈의 활약을 보면서 당시 어린이들은 애국심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만화에 단골로 등장하던 이강토는 우직한 한국 사나이의 전형이었다.

각시탈
각시탈

■‘심술가족’ 이정문 = 이정문(71)이 창조해낸 ‘철인 캉타우’와 ‘심술가족(심술첨지, 심술통, 심똘이 등)’은 70년대 만화에서 빠질 수 없는 캐릭터다. 그는 철인 캉타우 시리즈로 한국 만화에 SF장르를 개척하고, 심술 시리즈로 명랑 가족만화의 경지를 연 작가였다. 구두닦이와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으로 만화를 배운 그의 다이내믹한 삶이 만화에 녹아들었다.,

60년대 SF만화의 효시인 <설인 알파칸>을 시작으로 그는 꾸준하게 우주와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 등에 관심을 가져왔다. 또 <심술첨지>로 시작된 심술시리즈는 <심똘이와 심쑥이>, <심통이와 심뽀> 등으로 이어지면서 심술계보를 완성했다.


심술가족

■‘맹꽁이 서당’ 윤승운 = <꼴찌와 발명왕>, <맹꽁이 서당>, <두심이 표류기> 등 명작들을 생산해낸 윤승운(69)의 만화 주인공들은 늘 웃고 있다. 토속적인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울며 부대끼는 그들은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한결같이 해학과 유머를 갖추고 있다. 또 그 속에 늘 뭔가 배울만한 구절들이 꼭 들어간다. 그는 만화와 학습을 연결시킨 만화가였다. 그는 만화로 사자성어를 배우고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 훈장형 만화가였다.

맹꽁이서당

이들 외에도 수많은 만화가들이 70년대 만화대여소의 콘텐츠를 채우고, 각종 지면에 만화 연재를 하면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만화역사를 개척했다. 한땀한땀 이야기를 엮어내고, 먹선으로 캐릭터를 창조해낸 그들의 고뇌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세계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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