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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의사, 여자는 교사? 드라마 속 직업들 ‘다양성 실종’

요즘 드라마 속 남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의사 가운을 입었다.

KBS2 <빅>의 주인공 서윤재(공유) 직업은 소아과 의사이고, MBC <아이두 아이두>의 조은성(박건형)은 산부인과 전문의다. SBS <맛있는 인생> 속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강인철(최원영)은 외과의사, MBC 주말드라마 <닥터 진>의 진혁(송승헌)은 대학병원 신경외과 과장이다.

여주인공이 직업 중에는 교사가 눈에 띈다. <빅>의 여주인공 이민정과 SBS 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의 김하늘은 모두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등장한다. 드라마 주인공들의 직업이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편중돼 있다.

남자는 주로 의사나 건축가다. <신사의 품격> 장동건과 김수로, <맛있는 인생>의 정준은 건축가로 나온다. 최근 드라마 속 여자는 교사나 기자(SBS <추적자> 고준희, <유령> 송하윤, <맛있는 인생> 류현경) 등으로 압축된다.

직업이 한정되다 보니 병원이나 학교가 주된 배경으로 등장하고, 동료 교사나 동료 의사까지 등장해 직업 편중은 더 심화된다. 드라마 간접광고가 허용되면서 주인공 가족들은 하나같이 떡집, 죽집, 아웃도어브랜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PPL지원을 하는 업체들이 주로

주인공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업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2012 한국직업사전’에 수록된 직업 수는 총 9298개에 달한다. 몇 천 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직업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분명 한국 드라마의 한계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시청자들에게 시나브로 주입될 수 있고, 직업 이미지가 고착화 된다는 우려도 나올 수 있다. 이 같은 직업 편중 문제의 원인으로는 작가들의 이해 부족 등이 꼽힌다.

익명을 요구한 모 드라마제작사 대표는 “작가 경험치의 한계”를 요인으로 들었다. 이 관계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집안에서 집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없다. 발로 뛰며 취재해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지 않다 보니 ‘직업 재탕’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드라마 주 시청층인 30~40대 여성 취향에 맞추다 보니 직업 수가 제한되기도 한다.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여성 시청자들이 꿈꾸는 남자들의 직업이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이고, 남자주인공이 이른바 3D 직종일 때 감정 몰입을 하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극중 멜로를 끌어가기 위해서 남녀주인공이 만나야 하는데, 전문직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여주인공의 직업을 규정하다 보면 여성의 직업도 범위가 ‘거기서 거기’로 좁혀진다는 것.

전문직 드라마 기반이 약하고, 멜로물이 유독 강세인 한국 드라마 시장의 특수성도 이유 중 하나다.

<파리의 연인>(2004)과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을 기점으로 트렌디 멜로물 전성기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대안으로 전문직 드라마가 쏟아졌다. 2007년 <로비스트> <에어시티>, 이듬해 기자세계를 다룬 <스포트라이트> 등이 나왔으나 시청률에서 참패를 맛봤다. 비행기 조종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근작 <부탁해요 캡틴>도 실패작으로 꼽힌다.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등 일부 의학드라마를 제외하고 전문직 드라마는 성공사례가 드물다.

드라마 제작사들이 안정을 추구하면서 극중 직업은 주인공들의 멜로를 끌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활동가는 “<신사의 품격>에서 김하늘이 윤리교사로 설정된 것은 윤리의식이 투철한 개인 성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교사직에 대한 내용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빅>에서 교사인 이민정이 학생들이 놀릴 때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아이두 아이두>에서 성공한 커리어우먼 김선아가 일에만 몰두하는 억척스런 마녀처럼 그려지는 등 직업적인 성찰이 없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에서 다채로운 직업을 풀어놓으려면 결국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근간이 돼야 한다. ‘그렇고 그런’ 멜로구도 속에서는 ‘의학드라마=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수사드라마=경찰서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식의 구도가 재생산될 수 밖에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드라마가 멜로 라인에 집중하다 보면 직업적 탐구를 비껴간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종영된 <적도의 남자>가 화가, 투자회사 사장, 호텔리어 등 다양한 직업군을 다룬 것을 예로 들면서 “흔한 멜로 속에서는 직업군도 도돌이표가 된다. <적도의 남자>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야 그 안에 새로운 직업도 녹여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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