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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연이다]김정난 앞에서 ‘연기의 품격’을 논하지 말라

40대 남자들의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는 SBS TV 주말극 <신사의 품격>의 최대 수혜자는 김정난(41)이 아닐까. 방송평론가들은 물론 시청자들이 입모아 ‘김정난의 재발견’이라며 뒤늦게 그의 매력과 연기력에 감탄한다.

“박민숙(김정난) 보는 재미에 신사의 품격을 본다” “민숙이 같은 파워있는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여성들은 물론 “저런 능력 있는 마누라 만나 등 따시고 배 부르게 살고 싶다”는 남성들의 소심한(?) 희망사항도 이어진다. 인기를 입증하듯 톱스타 김남주나 패셔니스타 이효리 등에게나 붙여지던 ‘완판녀’로도 등극했다. 이 드라마에서 김정난이 쓰고 나온 선글라스가 수입물량 3000개가 다 팔리고 의상 브랜드까지 문의가 쇄도한단다. 드라마 초기엔 스타가 아니란 이유로 협찬도 어려워 자신의 옷과 액세서리를 착용했던 것에 비하면 감격스러운 변화다.

사진=SBS 신사의 품격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조각미남 장동건은 인물만큼 연기력도 따라주지만 “아, 세월은 장동건도 비껴가지 않는구나”란 진리만 실감케했다.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김하늘은 “귀여움은 30대 초반까지만 떠는 걸로!”를 보여주었다. 김수로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아직은 촌스런 임태산에게 서이수와 홍세라가 동시에 반한 것이 흔쾌히 납득가지 않는다.

건축사, 변호사 등 전문직의 40대 남자들은 고교 동창끼리 만나서 그런지 정신 연령은 항상 고등학교 시절의 치기어린 모습만 주로 보인다. 똑같이 40대의 여성들의 연애담을 보여준 <섹스 앤드 더 시티>와 비교하면 12세 이하 시청 가능 수준이고 진짜 신사가 누구이며 품격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 진정한 숙녀의 품격을 보여주는 것은 김정난이다.

김정난은 이 드라마에서 이정록(이종혁)의 아내 박민숙으로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금숟가락을 물고 나와 온 몸 세포 마디마디가 부티가 나는 데다 큰 우여곡절 없이 그 재산을 유지해 청담동에 건물만 여러 채다. 연하의 남편에게 교관이 사병 지시하듯 대하고 바람둥이 남편을 감시하기 위해 곳곳에 스파이(대부분 종업원이지만)를 심어두는 의심꾼이다. 남편이 말썽을 피울 때마다 자신의 빌딩 세입자인 남편 친구들을 소집해서 “당장 다른 사무실 구해보라”고 엄포를 놓는다. 다른 이들에게도 거만하고 쌀쌀 맞은 태도를 보인다. 어찌보면 정말 ‘청담 마녀’란 별명처럼 비호감의 극치일 수 있다.

반면 박민숙은 가장 통이 큰 해결사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도도한 태도에 딱 부러지는 말투로 홍세라의 빚도 갚아주고 건방지게 하극상을 보이는 골프선수 후배의 응징을 돕는다. 부잣집 아들을 때린 사고뭉치 서이수 제자 문제도 해결해주면서 “지금 니가 본 게 돈 없는 사람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야”라는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사진=SBS 신사의 품격

하지만 김정란의 탁월한 연기가 돋보이는 때는 부자 박민숙이 아니라 돈은 많지만 끊임없이 바람기를 발산하는 철없는 남편 때문에 불안하고 괴롭고 외로워하는 연상의 아내로서, 또 40대 중반에도 아이가 없어 초조해하는 여성으로서의 내면을 섬세한 표정과 맛깔스러운 대사 표현으로 보여줄 때다. 카리스마 넘치는 도도한 부자나 남편 때문에 애끓는 아내의 연기는 어지간한 연기자도 가능하다. 온갖 명품으로 몸을 휘두르고 메이크업으로 강렬한 눈매를 강조하거나 혹은 청승맞은 표정만 지으면 된다. 하지만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르고 온탕과 냉탕을 오가야 하는 박민숙의 다양한 캐릭터는 21년 경력의 김정난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드라마를 보다 보면 대사 하나 없이 등으로 연기가 되는 상황들이 있죠? 박민숙이 허랑방탕한 남편 이정록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다 도도하니 등을 돌릴 때면, 그 순간은 등이 연기를 합니다. 그렇게 외롭게 느껴질 수가 없거든요. 분명 코믹한 상황인데 뒷모습에서 아련한 슬픔이 배어 나오더군요.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남편, 평소 신조대로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정리를 했어야 마땅하나 악연인지 필연인지 수렁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남편의 꼼수를 빤히 알면서도 그의 연기와 노래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박민숙, 집착을 떨쳐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자존심도 상하고 비참하기도 할 거예요.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뒷 모습에서 고스란히 느껴지지 뭐에요.”

방송평론가 정석희씨는 김정난의 등 연기를 이렇게 극찬했다. 겉으론 화려하지만 속으론 허한 여성, 남편을 너무 사랑하지만 매번 나비처럼 다른 꽃을 맴도는 남편에게 실망하고 다시 속아주다가 점점 의부증 증세를 보이는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스러워 “이혼해달라”고 통곡하며 무너진다.

사진=SBS 신사의 품격

“난 이제 당신이 1 더하기 1은 2라고 해도, 믿지 못하겠어. 저 여자랑 무슨 얘기 했을까, 저 전화는 여잘까 남잘까, 웃는 걸까 웃어주는 걸까. 매일 지옥과 천당을 오가. 부탁이야. 이혼하자.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 끊임없이 당신 의심하는 내가 너무 미친년 같아서 그래”

우아함과 도도함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자존심 하나로 버텨오다 허물어질 때의 그 미묘한 감정을 처녀 김정난은 마치 십여년 결혼생활을 해본 아내처럼 표현한다. 남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눈물 흘릴 때 숱한 여성들이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김정난은 KBS 수목드라마 <각시탈>의 이화경 역에서도 빛을 발한다. 남편의 바람기에 고민하는 <신사의 품격>과 달리 이 드라마에서 그는 남편을 두고 외도를 하는 신여성,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라가 망하든 말든 아랑곳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희대의 요부로 등장한다. 그런데 욕망에 충실한 요부가 어쩌면 은밀히 독립군 군자금을 대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게 김정난의 매력이다.

김정난은 과거에도 청순가련한 역할보다는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한 여성 역을 주로 맡았다. 총 28편의 드라마 가운데 주인공에 가까운 역할은 고작 4편이고 다른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언니, 누나, 시누이 등 노처녀 단골이다. 그나마 <프레지던트>에서는 최수종과 겨루는 여성 최초의 검찰총장이자 대통령 후보 역을 맡아 당찬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그 역할도 드라마도 크게 화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떤 역할을 맡아도 그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민망한 연기력은 보이지 않았다. 동료들이 이미 성공행 기차를 타고 후배들이 추격해와도 항상 초심을 유지하고 항상 맡은 역할에 충실한 결과 이제 그는 조연과 주연이 중요하지 않은 진짜 연기자로 인정받고 있다. 김태희 얼굴에 전지현 몸매가 아니어도 시청자들은 우리 눈이 아니라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연기자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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