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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K의 음악편지]대학가요제를 기억합니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MBC <대학가요제>하면 음악계에선 전설과도 같은 행사였습니다. 수십 년간 가수들의 등용문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순수 아마추어들의 경연의 장으로서, 수상만 하면 곧바로 히트 가수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1977년 9월3일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 그날 오후에 방송된 1회 MBC <대학가요제>가 일으킨 파장은 생각보다 더 컸습니다.

굵직한 히트곡 하나가 터져 나옵니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40~50대라면 모를 리 없는 샌드페블즈의 노래 ‘나 어떡해’가 바로 당시 우승곡이었습니다.

1977년에 열린 제 1회 대학가요제.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학가요제는 각 캠퍼스에 그룹사운드 열풍을 재촉하는 촉매제로 작용합니다. 오늘날의 <슈퍼스타K>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통기타를 다시 잡게 하는 열풍이 35년전에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 가요계는 확실히 변혁을 맞습니다. 당시 청춘들은 비로소 음악을 직접 창작하고 직접 소비하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번안가요, 그리고 AFKN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미8군 음악 등을 대신해 청춘들이 직접 멜로디를 만들고 부르게 됩니다. 그 뒤로 가요계는 다채롭고 풍성해집니다.

밴드 산울림(김창완·창훈·창익 형제)이 ‘무이’란 이름으로 1회 대회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형제 밴드는 사실 예선전까지 1등을 할 만큼 강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본선 직전 맏형 김창완씨가 대학을 막 졸업했다는 이유로 본선 무대 진출이 순식간에 막히면서 막상 TV에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1978년 2회 대학가요제.

‘무이’(無異)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너무 이질적으로 받아들일까봐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우려와 달리 그들의 독특한 음악은 1년 뒤 곧 대중들을 매료시킵니다.

히트곡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내가’(김학래·임철우, 79년), ‘꿈의 대화’(이범용·한명훈, 80년), ‘참새와 허수아비’(조정희, 82년), ‘눈물 한 방울로 사랑은 시작되고’(이유진, 84년), ‘바다에 누워’(높은음자리, 85년)…. 유열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86년), 신해철이 소속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88년)라는 대상곡도 그 해 가요계를 휩쓸었던 노래입니다.

대상이 아닌 입상 경력만으로도 훗날 가수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노사연, 배철수, 임백천, 김경호, 심수봉, 이무송, 이정석, 조갑경 등이 무대를 통해 발군의 실력을 인정 받았지요.

MC를 누가 맡을 것인가도 관심사였습니다. 1회 대회 MC는 지금은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프로듀서가 맡았습니다. 그는 당시 잘나가는 통기타 가수 겸 방송인이었답니다. 여자 MC로는 인기 탤런트 명현숙씨가 무대에 섰죠. 미녀 MC들의 면면은 화려합니다. 임예진, 왕영은, 신현숙, 김희애, 박소현, 명세빈 등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노사연, 박경림 등 입담 좋은 스타들도 사회를 봤습니다. 노래 축제에 미녀가 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최근 MBC <대학가요제>가 36회째 행사를 마감했습니다. 9년간 MC를 맡았던 이효리씨가, 후배인 수지씨에게 MC를 물려주었더군요. 대상은 광운대 영어영문학과 08학번 신문수씨에게 돌아갔습니다. 기타를 쥔 채 자유롭게 노래하는 게 멋져 보였습니다.

네티즌들은 대상 상금 500만원이 너무 작은 게 아니냐며 쑥덕대기도 하더군요. 하기야, Mnet <슈퍼스타K4>는 상금이 무려 5억원이 됩니다. KBS <톱밴드2>도 1억원, SBS <K팝스타>도 3억원이었지요.

<대학가요제>는 올해부터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본선에 앞서 케이블 ‘MBC 뮤직’에서 <뮤지컬의 탄생>을 따로 편성하는 등 서바이벌 과정을 곁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분발했해도 여전히 힘은 부쳐보입니다. ‘화무십일홍’, 그런 말은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각설하고 이 말도 궁급합니다. ‘권불십년’, 권력이 진짜 십 년을 가는지 안 가는지, 저는 그게 궁금한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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