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스토리 헬퍼’가 독창성을 인정했다고?

▲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해냄/515쪽/1만5000원

2004년 인기 MMORPG(대규모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리니지 2>의 ‘바츠 서버’를 특정 길드(같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가 장악한 일이 있었다. ‘DK혈맹’(드래곤 나이츠)으로 불리던 길드와 길드의 수장 아키러스는 게임내 정치·경제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다른 게이머들을 공격하는 등 철권통치로 악명을 떨쳤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하지만 MMORPG는 현실 세계의 계급과 권력 구조를 빼다 박은 가상 세계가 구현되는 게 특징이다.

결국 독재를 견디다 못한 게이머들은 일명 내복단을 창설, 게임 내 자유를 찾기 위해 DK혈맹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내복단은 캐릭터 생성 때 착용되는 기본 복장인 내복에서 따온 명칭. 당시 DK혈맹의 횡포에 저항하기 위해 수많은 게이머들이 바츠 서버로 몰려들었으며, 새롭게 생성된 캐릭터들이 아무런 장비(무기)없이 맨몸으로 달려드는 비장한 장면을 연출해 주목을 받았다.

▲이야기꾼이자 게임마니아 이인화 새 장편
중세 전쟁과 현대 추리극의 흥미진진 이중구조
내년 美 출시 웹전략게임 원작으로 사용키로

참여 인원 약 100만 명, 무려 5년여의 전쟁 끝에 철권을 휘두르던 DK혈맹은 낮은 레벨의 게이머들로 구성된 내복단에 의해 축출됐다. 이후 이 사건은 게임 내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며 이른바 ‘바츠 해방전쟁’으로 불린다.

특히 해방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던 소설가 이인화에 의해 이 사건이 소개되며 ‘가상 공간의 시민혁명’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46)는 “비록 가상 세계에서 발생한 전쟁이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또 “그때의 감동에 대해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품어왔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게임버전 <카탈루니아 찬가> 내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고 싶었다는 얘기쯤으로 보면 될까.

그가 8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지옥설계도>는 이 같은 생각을 8년간 숙성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이 때문인지 “문장도, 묘사도, 미학도 모두 무시하고 원고지 2000매를 눈 깜짝할 사이에 써버렸다”고 했다.

스릴러·추리·판타지·SF가 복합된 형식의 이 소설은 대구의 한 호텔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에서 시작된다. 한때 정예 요원이었으나 퇴출 직전에 내몰린 담당 수사관 김호는 현장에서 정교한 조작의 흔적을 간파한다. 김호는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배후에 보통 사람보다 10배 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화인간과 범국가적 조직인 공생당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공생당 의장인 이유진의 피살을 시작으로 강화인간들에 대한 연쇄 공격에서 위험을 감지한 안준경은 살인범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이유진이 만들어낸 최면 세계 ‘인페르노 나인(지옥 9층)’으로 내려간다. 쓰러진 강화인간들을 각성시키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선 ‘지옥의 설계도’를 찾아야 한다.

현대의 추리극과 게이머들에게 친숙한 중세 전쟁의 이중 구조로 이뤄진 소설은 내년 1월 미국 게임사 크루인터랙티브에서 출시 예정인 웹전략 게임 <인페르노 나인>의 원작으로 사용된다고. 애초부터 게임 제작을 염두에 두고 쓴 때문인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벌여 놓은 것에 비해 결말을 서두른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용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이 소설을 쓰는데 자신이 개발한 저작 지원 프로그램 ‘스토리 헬퍼’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힌 부분이다. 내년 3월 일반에 무료로 공개된다는 ‘스토리헬퍼’라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저작도구다. 머릿속에 든 온갖 분절된 아이디어를 이용해 장르·인물·상황·행동 등에 관한 29가지 객관식 질문에 답을 입력하면 A4지 한장 분량의 일관된 줄거리를 뚝딱 만들어 낸다는 설명이다.

특이한 점은 스토리헬퍼가 쓰고자 하는 글의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기존 작품들과의 유사성을 백분율로 알려준다는 것.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영화 <광해>의 정보를 입력했더니 (표절 논란을 빚은) 영화 <데이브>와 75% 비슷했다. 하지만 영화 <아바타>와 <늑대와 춤을>의 유사성은 87%였다”며 “서사의 패턴은 한정돼 있다. 결국 독특한 캐릭터 창출, 사회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인 통찰이 작품을 새롭게 만드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또 <지옥설계도>에선 독창성을 선택했다고도 밝혔다. 세상의 어떤 이야기와도 유사성이 55% 이하라는 것. 그만큼 신선하고 독자의 예상을 깨는 반전이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책에는 장르 소설 팬이라면 어딘가 낯익은 설정이 적지않게 등장한다. 하기야, ‘호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 모든 공포물은 딱 세가지, <드라큘라> <늑대인간> <프랑켄슈타인>의 변주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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