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2006년의 서재응은 2013년의 노경은

노경은 “봄엔 WBC 4강 거들고, 가을엔 15승 거두겠다”

2006년 3월15일 미국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한·일전.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킨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마무리 오승환(삼성)이 1점 차 리드를 지켜 숙적 일본을 2-1로 누르고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서재응(KIA)은 경기 뒤 흔들던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은 뒤 환호했다.

이 장면은 한국야구가 세계 중심에 섰다는 의미로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다. 태극기 세리머니는 어느새 WBC 4강 세리머니가 됐다. 3년 뒤 2회 대회에서도 봉중근(LG)이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일본을 누르고 4강 진출을 확정짓자 똑같은 세리머니로 결승 진출을 자축했다.

혹독한 한파가 몰아친 지난 연말 잠실구장. 아직 눈이 남아 꽁꽁 얼어붙은 마운드에 선 두산 투수 노경은(29)이 WBC 활약을 다짐하며 태극기를 잡았다. “그 장면을 저도 생생히 기억합니다”며 같은 포즈 취하기를 쑥쓰러워 한 노경은은 “전 국민이 응원하는 무대에 나가는 게 어깨가 무겁지만 내게는 최고의 기회”라며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도 서재응처럼… 두산 노경은이 지난달 27일 잠실구장에서 손에 든 태극기를 바라보며 WBC 활약을 다짐하고 있다. 잠실|김기남 기자

▲2군서만 잘 던지던 투수서 대표팀 기대주로
내심 바랐지만 엔트리 포함돼 ‘가문의 영광’

▲“보직은 상관없지만
미국·일본전서는 1이닝이라도 던졌으면…”

2013년 계사년 가장 주목받는 선수인 노경은의 몸과 마음은 이미 준비를 마친 듯 따뜻한 봄날의 야구 열기로 가득한 WBC와 페넌트레이스 마운드 위에 있었다.

■WBC는 최고 영광이자 기회

노경은에게 태극마크를 달고 굵직한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라곤 2009년 야구월드컵뿐이다. 불과 3년전 ‘2군에서만 잘 던지는 투수’가 내년 3월 WBC에 출전하는 대표팀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는 선수로 위상이 달라졌다. 지난 2년 사이 팀내에서 중간계투-필승조-에이스로 입지가 급상승할 정도로 기량이 성장했다. 특히 9월에는 2경기 완봉승을 포함해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선발 34이닝 무실점의 완벽투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노경은이 시즌 뒤 대표팀 예비 엔트리에 포함됐을 때 놀란 사람은 노경은뿐이었다.

노경은은 “WBC를 경험하고 싶은 욕심이 내심 있었지만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 백업이라도 20% 정도라고만 생각했다”며 “그런데 엔트리에 이름이 들어가니 가문의 영광이다”며 흐뭇해했다.

노경은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류현진(LA다저스), 김광현(SK) 등 간판 선수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역대 최악의 마운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표팀에서 대안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1·2회 대회 사령탑이었던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은 “2회 대회 때 투수진이 불안한 상황에서 봉중근과 정현욱의 깜짝 활약이 대단했다. 류현진·김광현이 없는 3회 대회에서도 이런 선수가 필요하다”며 노경은을 언급했다.

노경은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보면 대표팀이 위기라고 볼 수 있지만 나에게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잘 던지면 그만큼 나를 어필할 수 있지 않은가. 시즌도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표팀 선수라면 누구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궂은 일을 자처했다. “단기전에 선발, 중간은 의미없다. 충분한 휴식, 로테이션만 주어진다면 보직은 상관없다. 언제든 기회만 되면 나가고 싶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단 태극마크이기에 더 각별하다. 그는 “내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여든 살에도 자랑스러워 할 것 같다. 1∼2년 잘하는 것 보다 1진 국가대표로 뛴 사실을 나중에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니폼은 사인을 받아 가보로 삼을 생각이다”고 덧붙였다.

1회 대회 때 노경은은 공익근무 중이었다. 박찬호가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전에 마무리 투수로 나와 “한국이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 야구를 이길 수 없게 만들겠다”고 큰소리 친 이치로(뉴욕 양키스)를 플라이로 잡아내던 장면을 박수치며 응원한 한 사람이었다. 2회 대회는 2군에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 TV로 지켜봤다.

노경은은 “1회 대회 때 친한 친구인 전병두(SK)가 뽑혀 관심있게 보면서 ‘아! 저기서 어떻게 던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번 꼭 던져보고 싶다”면서 “지난 시즌 때처럼 야구를 모르는 국민들도 ‘두산 노경은이라는 투수가 정말 열심히 던지더라’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ML 마운드 꿈 이루고파

노경은이 WBC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또 있다. 어릴 적부터 꿈꿔온 미국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설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노경은은 잘 나가던 고교 시절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두산에 입단할 때도 “잘해서 꼭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겠다”고 다짐했지만 2군 생활에 오래 머무는 바람에 이마저도 쉽지 않아졌다.

노경은은 “주위에서 장난으로 ‘(FA자격을 얻는) 36살까지 잘해 해외에 가면 되지’라고 하는데 이번에 잘한다면 나도 36살에 해외진출을 할 수 있겠다는 꿈이 생길 것 같다. 꿈이 있어야 더 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웃으면서 “WBC는 메이저리그 팀에 가지 못한 10년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다. 어릴 적에는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기립박수 받는 게 꿈이었다. 세계 무대에서도 ‘한국선수 백넘버 몇 번 누구가 공 좀 던질 줄 알더라’는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설레이는 마음을 밝혔다.

노경은이 메이저리그 구장에 서기 위해서는 1·2라운드를 통과해야 한다. 2라운드에 진출할 경우, 일본·쿠바·대만과의 예상 대진을 떠올린 뒤 “우리랑 일본이 통과하지 않을까요? 미국가서는 다시 일본을 이긴다는 게 내 시나리오다. (웃음)”고 전망했다.

해외리그에서 뛰는 타자들과의 맞대결도 기대하고 있다. 지난 시즌을 통해 자신감을 가진, 자신의 공을 시험대에 올릴 기회다. 노경은은 “미국, 일본전에는 1이닝이라도 던져보고 싶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타자나 일본 타자들이 내 직구를 잡아놓고 치는지, 조금은 밀리는지도 보고 싶다. 슬라이더, 커브, 포크볼 등 변화구에 대한 반응도 궁금하다. 힘있는 타자와 정교한 타자들, 우리나라와는 다른 스타일을 경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계사년 약속 ‘WBC 4강 찍고, 15승 찍고’

노경은은 “겨울 동안 두려우면 실패고, 설레면 성공이다”는 선배 손시헌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실제로 작년 겨울에는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이 컸는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목표했던 연봉 7000만원도 훌쩍 넘겼다. 성공의 결실을 맛보았기에 올겨울은 유니폼에 땀이 마를 날 없이 훈련하고 있다.

그는 “새해에는 개막부터 선발로 뛰니까 더 기대하고 있다. 선발로 나갈 수 있는 경기도 많아졌고, 작년에 뛰면서 선수들을 많이 상대해봤으니 다음에는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욕심은 금물. 매 순간,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목표 승수를 정하지 않았다. 오랜 2군 생활을 통해 힘보다 여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경은은 “선배들이 더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조언한다. 일단 작년에 잘했기 때문에 그만큼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면서 “그런데 작년처럼만 하면 15승 페이스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준비하겠다”고 했다.

노경은은 자신있게 2013년을 그리면서 팬들과 약속했다.

“국가대표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집중하겠습니다. WBC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시즌 스타트를 좋게 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아, 개막전에 잘 맞춰서 돌아오겠습니다.”

상단으로 이동 스포츠경향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