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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대 진출 이룬 유재학 감독, 그가 말하는 또다른 고민

“내년에도 대표팀 지휘봉? 소속팀 볼낯없어 아직은…”

남자 농구의 숙원이라던 세계 무대 진출을 이룬 11일 필리핀의 밤.

기쁜 마음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유재학 감독(50)은 “내년에도 지휘봉을 잡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 했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곁에 있던 이상범 코치는 “감독님이 불쌍하다”며 “마음 고생이 너무 심해 차마 계속 같이 가자는 얘기를 못 하겠다”고 말했다. 내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릴 농구월드컵(세계선수권)에서 사령탑이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애초 대한농구협회는 유재학 감독에게 월드컵, 아시안게임까지 지휘봉을 맡기겠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니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유재학 감독은 한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무게가 달라요.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승부조작 파문으로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한국 농구를 살려야 한다는 기대 속에 지휘봉을 잡은 그의 부담감이 절로 느껴졌다. 아시아선수권을 놓고 농구인들 사이에서는 “잘하면 본전, 못 하면 역적”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실제 필리핀과의 준결승전에서 79-86으로 석패하자 “대비가 안이했다”는 비판 여론이 일부에서 일어났다.

유재학 감독은 그게 너무 속상했다고 토로했다. “우리 애들 지지 않았습니다. 필리핀하고 제3지역에서 맞붙었으면 가볍게 이겼어요. 심판 장난이요? 제가 확인한 것만 십수 가지가 넘어요.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막판에 역전까지 이뤘는데…. 그걸 알아주는 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또 힘들었습니다.”

내년 농구월드컵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도 이 대목에서다. 한국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1998년 그리스 대회 성적표는 출전국 16개 팀에서 꼴찌. 조별리그 3전 전패, 순위결정전 2전 전패 등 단 1승도 거두지 못 했다. 유재학 감독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유재학 감독의 발언에 가장 놀란 것은 선수들이다. 조성민은 “감독님만 믿고 따라가는 데 그만두면 안 됩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숨을 푹 쉰 유재학 감독은 “아직 모른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끄는 또 다른 팀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유재학 감독은 지난 6월3일 진천선수촌에 들어선 뒤 모비스 측과 아예 연락을 끊었다. 프로 감독이라면 빠짐없이 참가하는 용병 트라이아웃 캠프도 포기했다. 올해 용병은 두 명 모두 재계약을 했다지만, 부상 등 변수가 생기면 막막할 수밖에 없다.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두 가지 모두 잘할 수가 없으니…. 소속팀에 염치가 없으니 돌아가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입니다.”

15일부터 열리는 프로·아마 최강전도 그저 코치에게 맡겨야 하는 형국이다. 유재학 감독은 “그 친구가 제 대신 2개월간 준비했어요. 그렇다면 그 친구가 지휘하는 게 맞겠죠”라고 말했다.

그래도 유재학 감독은 한국 농구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 했다. 지휘봉을 내려놓을 수도 있다면서도 절절한 조언을 쏟아낸 것이다. “70여일간 대표팀을 맡으면서 몇 가지 고쳐야 할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맡지 않더라도 개선해야 할 부분입니다.”

먼저 상대 전력을 분석할 수 있는 전문인력의 필요성을 들었다. 프로에서야 매번 경기를 치르는 상대니 문제가 없다지만, 일년에 한 번 만날까 싶은 상대를 꺾으려면 정보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유재학 감독은 “대회 내내 정보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상대를 알지 못 하는 데 어떻게 이기겠어요”라고 말했다.

또 국제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국제대회 수준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국제 무대를 경험한 선수들과 그렇지 않은 선수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평소 다른 나라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른다면 그 차이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겠죠.” 다행히 이 부분에선 대한농구협회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선교 한국농구연맹 총재도 필리핀과 정기전을 검토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재학 감독은 “협회나 연맹 모두가 한 마음이 되서 움직인다면 큰 힘이 될겁니다. 그러면 누가 맡아도 좋은 성적을 내기 더 수월해지겠죠. 저도 마찬가지고요”라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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