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내가 주연이다]‘주군의 태양’ 김미경

어디서 본 듯한 얼굴…어디서도 못본 연기

수더분한 아줌마, 살인범 등
맡는 역마다 원래 그인 듯 몰입
이번엔 데뷔 첫 재벌가 여성 변신

김미경은 강한 캐릭터의 배우는 아니다. 아줌마들이 많이 모이는 계모임이나 찜질방에서 한번 본 듯한 얼굴이고 고모나 이모 등 친척 가운데 한 명쯤은 비슷한 이미지를 가졌다. 혹은 식당에서 무심하지만 속정 깊게 깍두기를듬뿍 담아 툭 던져주는 그런 아줌마의 모습이다.

그렇게 친근하고 익숙한 얼굴의 그가 배역을 맡으면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란 의문을 가질 만큼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낸다. 그가 처음 드라마에 출연한 <카이스트>에서 ‘석학의 집’이란 매점 겸 카페 주인 아줌마 역할을 맡았을 때 많은 청소년들은 “매점 아줌마는 다 저런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생활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그동안은 수더분한 아줌마, 묵묵히 견뎌내는 맏며느리, 청소부나 식당 아줌마, 혹은 사극에서도 궁녀 역할을 주로 맡아 서민적인 연기자로 알려진 그가 최근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서 재벌가 사모님으로 럭셔리해졌다. 김미경은 이 드라마에서 남주인공 소지섭(중원)의 고모인 주성란 역할을 맡았다. 이 드라마의 인물 설명에 따르면 ‘고고 우아가 인생 모토인 시크하고 건조한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재벌가의 딸이자 주인공의 고모로 샤넬풍의 수트에 미용실에서 정성껏 손질한 헤어스타일, 명품 액세서리를 하고 나온 모습에 시청자들은 처음엔 낯설어했다. 질끈 묶은 머리나 스웨터에 앞치마 차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MBC <빛과 그림자>에서 아들의 친구로 등장했던 이종원과 부부 사이로 나와 어색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회가 거듭될수록 김미경은 장면마다 자신의 역할의 당위성을 보여준다. 원래 화려한 싱글로 늙고 싶었던 그는 한참 어린 남편 이종원의 구애로 40대에 결혼했다. 국내 최고대학 경영학부 석사 출신이지만 해외파가 아니란 열등감에 조바심을 내고 유학파 직원을 갈구는 남편의 출세욕이 저열해 보이지만, 그래도 모른 척 은근 열심히 밀어주는 속 깊은 아내다. 아이가 없어 하나뿐인 조카 소지섭이 아직까지는 남편보다 애정 대상 1위인 특별한 고모다.

그래서 항상 소지섭의 건강과 안녕과 행복을 걱정하고 소지섭 주변의 여성들에게 신경을 쓰며 극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공효진(태공실 역)과 소지섭이 함께 있다가 위험을 당한 사실을 알고, 공효진을 오해해 따귀를 때리며 “다시는 중원이 앞에 얼쩡거리지마”라며 분노를 표한다. 또 공효진이 영매사 임을 알고 소지섭의 옛 여인이며 죽은 차희주를 불러낼 수 있는지를 물어보며 제발 조카를 내버려둘 것을 강요한다.

주성란 역은 부잣집 딸 출신에, 엄마보다 더한 애정을 조카에게 보이는 집착증이 있는 성격으로 지나치게 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김미경은 연하의 남편과 닭살스러운 애정표현을 하기도 하고 동화 <폭풍우 치는 밤에>를 읽고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여린 모습을 내비치는 등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부각시키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청자들은 게시판 등을 통해 “김미경의 연기는 언제나 믿고 본다” “김미경씨 연기 너무 잘한다. 아 진짜 가끔 이렇게 연기 무섭게 잘하는 분들 때문에 TV 볼 맛 난다니까 ㅋㅋㅋ” “확실히 김미경씨는 연기를 진짜처럼 만드는 흑마술을 쓴다. 천상 배우다” 등의 칭찬 글을 남겼다.

‘TV리포트’가 감독·PD를 대상으로 조사한 신 스틸러(주연은 아니지만 강한 존재감을 보이는 배우) 설문조사에서 김미경은 김혜옥에 이어 여자 연기자 중 2위를 차지했다. 연기의 달인들에게 순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극중에서 사이코 등 독특한 캐릭터가 아니어도 그는 언제나 연출자나 시청자 모두에게 믿음을 주는 배우다.

지난해 그가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경찰서 청소부로 등장하자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 등에는 “청소만 하다가 끝낼 배우가 아닌데…”라는 반응이 많았다. 아무리 남주인공 박유천에게 슬쩍 정보를 제공하고 살갑게 굴지만 청소만 할 사람은 아니어서 갸우뚱하던 시청자들은 결국 그가 극중 중요 역할인 살인범으로 밝혀지자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란 딸이 있다며 박유천을 ‘우리 사위’라고 부르던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와 정우가 증거품을 확인하고 체포하려는 순간, 전기충격기로 박유천을 쏜다. 정신이 든 박유천에게 “딸은 죽었다”고 고백하며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과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그 대신, 거기엔 성폭행 살인범을 죽인 범인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180도 달라진 눈빛연기를 펼친 김미경의 호연은 보는 이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고, 극의 긴장감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결국 살인죄로 구속된 그를 찾아온 송옥숙에게 수갑을 찬 김미경은 “이상하죠? 이러고 있는데 마음은 참 편하네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표정에 시청자들은 허구의 드라마인데도 “엄마가 딸 살인범을 죽였는데 정상참작 안 되나요” 등의 감정이입을 보이기도 했다.

김미경은 <여명의 눈동자>의 제작팀 스크립터로 활동하다 23세 때인 1985년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 연기자로 변신했다. 그의 끼를 알아본 한 선배의 권유였다. 연극 포스터를 붙이며 막내 생활을 하다가 연극무대는 볼 시간도 없었지만 연습 과정을 지켜보며 대사를 외운 덕분에 다른 배우가 결혼하며 생긴 빈자리를 꿰차 <한씨연대기>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그후 10년간 제대로 쉬지도 않고 연극 무대에 섰고 1990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도 탔다. 1994년 연극 연출가인 남편과 가정을 이루고 공백기를 가졌다가 1999년 <여명의 눈동자>로 인연을 맺은 송지나 작가의 권유로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브라운관에 첫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02년 김종학 감독의 드라마 <대망>에서 주인공의 몸종 시월이 역을 맡아 주목받았고, <태왕사신기> <상두야 학교가자> <신의> <탐나는 도다> 등 30여 작품에 출연했다. 주로 억세게 살아가는 천민이나 고생하는 역할, 남편이 없거나 있어도 무능해 생활을 책임지며 딸과의 유대관계도 돈독한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부잣집 딸에 남편에게 사랑받는 역할은 <주군의 태양>이 처음이다.

“너무 억척스럽고 여성적이지 않은 역할을 맡아왔지만 그래도 아직은 평범하고 일차원적인 배역은 안 당깁니다. 지금도 극과 극을 넘나드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한 장면만 나오더라도 의미 있는 역할이면 상관 없어요. 주연과 조연을 나누는 것도 이상하죠. 다 같은 배우인데요. 연기는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죠. 내 속에 있는 다양한 점을 제 때에 끄집어내, 정직한 표현과 진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연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더 진정성 있는 어머니 역할을 위해 일하지 않을 때는 중학생 딸과 남편과 함께 가정에 충실하다는 김미경. 딸이 성장할수록 그의 어머니 역할도 더 깊어질 것 같다.

상단으로 이동 스포츠경향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