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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직역과 의역 사이, 말 따로 자막 따로…‘두 얼굴 외화’

‘분명히 저런 뜻이 아니었는데….’ 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배우의 대사와 다른 한국어 자막이 스크린에 나타나곤 한다. 번역 과정에서 성에 대한 묘사나 욕설을 일부러 ‘순화’시키기 때문이다. 또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유머나 속담도 한국식으로 고쳐진다. 의도적으로 비틀어 더 많은 한국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때로는 ‘OK’보다 ‘NG’ 장면이 더 웃음을 주듯, 직역과 의역을 비교하면 영화의 재미가 더 커진다. 번역가 이진영, 황석희, 윤혜진씨가 번역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성적인 묘사=황석희 작가는 지난 8월 개봉된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사진>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을 재치있게 번역했다. 마술사 메리트가 최면술로 남자의 불륜을 폭로하는 장면에서 “어떤 산업인데, 가장 오래된 산업(It’s a kind of business. Maybe the oldest business)”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가장 오래된 산업은 매춘을 뜻한다. 그저 출장이었다고 둘러대는 남자를 비꼬면서 ‘비즈니스’와 ‘가장 오래된 비즈니스’로 말장난을 하는 부분이다. 이 대사는 ‘출장’이라는 대사를 접합점으로 삼고 매춘의 뜻도 살려 ‘출장은 출장인데, 출장 안마 비슷한 …’으로 번역됐다.

38년간 8명의 대통령을 수행한 백악관 집사의 이야기를 다룬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는 여러 명의 버틀러(집사)가 등장한다. 백악관 집사인 카터가 버틀러 대기실에서 주인공 세실에게 성적 농담을 한다. 원 대사는 ‘그것 봐? 내 물건이 타이트 하지?(See? Told you my stuff was tight)’였다. 매우 야한 대사다. 번역을 맡은 이진영씨는 ‘것봐, 나 꽤 하지?’라고 표현했다. 에둘러 전한 덕분에 이 영화는 ‘15세 이상’ 등급을 받았다.

’버틀러:대통령의 집사’

내년 초 개봉하는 <필로미나>에서도 번역가에게 고민을 안겨준 대사가 있었다. 주인공인 ‘필로미나’는 순수하고 귀여운 할머니인데, 어린 시절 하룻밤의 실수로 미혼모가 된 아픔을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난감한 단어가 나왔다.

필로미나가 ‘내가 음핵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니까(I didn’t even know I had a clitoris)’라고 말한다. 영화 수입사는 더 많은 관객을 모으기 위해 더 낮은 등급을 받길 원한다. 이진영 작가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질(vagina), 음핵(clitoris), 음경(dick) 같은 표현은 번역작가들에게 큰 숙제”라면서 “이 영화처럼 12세 정도의 관람 등급을 생각하는 경우엔 외설적인 단어가 튀어나와 고민스러웠다”고 했다. 자막은 어떻게 나갈까. ‘여자로 사랑 받는 게 이렇게 좋구나 했다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는 욕=젠장, 제기랄 정도로 번역되는 ‘shit’ ‘fuck’은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사 중 하나다. 같은 단어라도 영화 성격에 따라 다른 자막을 입힌다. 3월 개봉된 좀비 로맨스물 <웜바디스>에서 유행어와 결합됐다. 남자주인공 R은 옷 갈아입는 줄리를 보면서 속으로 ‘holy shit! holy....shit!’을 외친다.

‘웜바디스’

황석희 작가는 “세상에, 맙소사, 어이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감탄사인데 같은 대사가 두 번 반복되는 데다 단어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 고민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주요 타깃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는 점을 감안해 나온 자막은 ‘헐?!!’, ‘허....얼?!!’이었다. 줄리가 떠나자 친구인 M이 R을 위로 하면서 ‘bitches, man’라고 욕한다. 직역하면 ‘계집애들이 다 그렇지’ 정도가 되겠지만, 분위기를 살려 ‘매정한 년’으로 번역됐다.

지난해 172만 명을 모아 최고 흥행 프랑스 영화 기록을 세운 <언터처블: 1%의 우정>에서는 욕(fuck)이 전혀 다르게 표현됐다. 잡초처럼 살던 드리스가 필립을 따라 오페라에 가는 장면. 공연시간이 4시간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 욕(fuck·프랑스어는 putain)을 내뱉는데 한국어 자막에는 ‘날 죽여라’로 나왔다.

이진영씨는 “대사의 수위 조절은 영화의 장르, 등급, 등장인물의 성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A를 B로 번역한다’는 공식은 아예 없다”며 “상황에 따라 번역작가의 기량이 발휘된다”고 말했다.

문화적 차이를 넘어 토착화 된 대사=우디 앨런의 영화는 특유의 유머와 비유가 많아 번역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 <블루 재스민>을 번역한 윤혜진 작가는 “번역의 맛을 많이 살려야 하는 영화였다”고 말했다.

‘블루재스민’

<로마 위드 러브>에서 로마에 도착한 미국인들이 “로마는 시간이 멈춘 도시잖아. 인생무상 제행무상이 느껴진 달까”라고 말한다. 원래는 18세기 영국 시인 퍼시 셸리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2세인 ‘오즈만 디아스(Ozymandias)’에 대해 쓴 시 구절이 등장한다. 엄청난 권세를 누렸던 오만한 군주도 부서진 석상으로 기억된다는 내용이다.

<블루 재스민>에도 유행어를 더한 의역이 자주 등장한다. “파산하니까, 이사 왔잖아(Now she’s broke, she’s moving in)”는 “개털 되니까 찾아왔다구?”로, “안목이 있잖아(She’s got taste)”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대사는 “우리 언니가 한 센스하거든”으로 번역됐다.

한국 관객들에게 익숙한 대사를 살린 자막도 있다. 스파이크 리 감독 연출로 만들어진 미국판 <올드보이>는 다시 한국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윤혜진 작가는 원작에서 오대수의 ‘누구냐 넌’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조시 브롤린의 “Who is this”란 대사도 똑같이 번역했다. 우진의 누나를 매춘부라고 놀리는 장면도, 한국판 표현과 똑같이 ‘걸레’로 번역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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