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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연이다] ‘미스코리아’ 이미숙

세계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는 36세에 은퇴해 헐리우드의 전설이 됐다. 더 이상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86세까지 살며 매일 늙어가는 모습을 스스로 확인해야 했다.

55세의 이미숙은 가르보에 비해 훨씬 자존감이 강한 배우다. 끊임없이 사생활이 노출되고, 주름살이 치명적인 여배우의 삶을 살면서도 그는 주변의 시선이나 나이듦에 당당하다. 이젠 더이상 영화 <겨울나그네>의 주인공이었던 청초한 여대생이 아니고 20~30대 연기자들의 어머니로 나오지만 사람들은 그가 조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서나 주연같은 존재감을 보이는 배우다. 1997년이 배경인 MBC 수목드라마 <미스코리아>에서 그는 ‘퀸 미용실’ 마애리 원장역을 맡았다. 67년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실력파 미용실 원장이다. 후배 양성을 통해 퀸미용실을 전국 톱 미용실로 키워냈고 인재를 보는 탁월한 감각, 미스코리아에 대한 축적된 노하우로 그의 도움을 받으면 미스코리아가 되는 미스코리아계의 미다스의 손이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날렵한 몸매, 완벽한 화장, 꼿꼿한 자세 등 주변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아우라와 카리스마를 갖췄다.

미스코리아에서 퀸 미용실 원장 마애리 역을 맡은 배우 이미숙.사진·MBC 제공

주인공 이연희(오지영)와 대척점에 서서 갈등을 유발하고, 자신의 손으로 미스코리아 진을 만들기 위해 독한 말을 하는데도 그는 악역으로 비난받기 보다는 오히려 ‘국민 선배’란 타이틀을 얻었다. 미스코리아 메이커라는 자부심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비열한 술수를 쓰지않는 대쪽 같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당시 열기가 뜨거웠던 미스코리아 대회를 모티브로 후보들과 미용실의 암투와 에피소드를 엮은 이 드라마에서 이미숙은 마치 1990년대 후반을 걸어다니는 듯한 완벽한 인물 설정으로 ‘미스코리아’에서 현실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숙은 엘리베이터걸인 이연희를 미스코리아를 만들기로 한다. 이연희는 첫사랑 이선균(김형준 역)의 화장품 회사를 살리기 위한 용병으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대중들 앞에서 수영복을 입어야 하고 빈약한 가슴을 성형수술로 키우라는 요구에 갈등한다. 자신의 내면을 깨고 미스코리아로 거듭나는 과정에 이미숙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미스코리아에 대한 철학과 진성성이 드러난다.

“재벌 딸도 태어날 땐 홀딱 벗고 나와. 벗어!” “내 품이냐 아니냐가 미스코리아가 되느냐 마느냐의 꼭짓점 이다”

이런 말들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자신감과 꼼수를 용납하지 않는 자존심, 때로는 변태처럼 보일 정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등은 마원장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을 높인다.

시청자들이 이미숙의 마애리 원장 연기에 공감하는 것은 미스코리아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은 인물임을 잘 보여주는 덕분이다.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발판이 되어줬던 ‘미스코리아 대회’를 단순히 미인대회로 치부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줄 ‘꿈의 무대’로 여기기 때문에 그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미스코리아 후보를 찾던 중 우연히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미성년자를 발견하고는 ‘아무 앞에서나 옷 벗어선 안 된다. 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지원하고, ‘미스코리아가 절대로 쉬운 여자처럼 보여서는 안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또 미스코리아 대회를 둘러싼 잡음에 대해서도 대회 자체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처럼 이미숙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미스코리아가 단순히 외모만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한다는 나름의 소신을 갖고 있다. 또한 후보들을 누구보다 혹독하고 힘들게 트레이닝 시키면서도, 그들의 약점을 따뜻하게 감싸고 진짜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네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이를 바탕으로 후보를 길러내는 모습으로 이미숙은 악역이 아니라 닮고 싶은 선배로 재탄생 됐다. 이 드라마에서 그동안 가장 높은 분당 시청율을 보인 장면도 주인공인 이연희와 이선균이 등장한 순간이 아니라 이미숙이 이연희의 집을 찾아간 장면일 정도다.

“도대체 이미숙이 아니라면 누가 이 역할을 소화할까” “역시 명불허전” 등 시청자의 칭찬이 이어지는 이미숙의 연기를 전문가들은 ‘마이크로 연기’라고 한다. 악역이나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은 동작이나 목소리가 크고 감정의 기복도 심하게 연기하지만, 이미숙은 큰 표정 변화가 없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섬세한 연기로 표현하는 덕분이다. 더구나 이미숙은 현재 MBC 일일드라마 <빛나는 로맨스>에서는 인자한 어머니로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더더욱 감탄사를 자아낸다.

미스코리아에서 퀸 미용실 원장 마애리 역을 맡은 배우 이미숙.사진·MBC 제공

이미숙은 실생활에서도 카리스마가 강하다. 그와 함께 연기하는 후배들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1978년 미스 롯데로 연예계에 데뷔한 후 그는 1979년 영화 <모모는 철부지>에서 단번에 톱배우로 급부상 했다. 이후 영화 <불새><고래사냥>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뽕’> 등에서 순수함과 섹시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팔색조 매력을 선보였다. 이후 결혼과 유학 등으로 공백기를 보내다 1998년 영화 <정사>로 컴백, 10년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유부녀 서현 역으로 톱스타의 귀환을 선언했다. 그후 드라마 <야망의 세월> <신데렐라 언니>등에서 억척스러운 엄마 역을 맡았지만 그는 여전히 관능적이고 위험한 여성미를 간직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숱한 스캔들을 겪었지만 그는 건재하다. 그리고 탑과 유아인 등 아이돌스타들이 가장 함께 연기하고 싶은 여배우로 꼽는 아줌마들의 워너비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할 게 너무 많다. 남들이 살짝 지쳐 쓰러질 때 난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간 포기하고 방황하느라 흘려보냈던 것 들도 있었지만 이제야말로 정말 거리낌 없이, 걸릴 것 없이 연기에 올인할 때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욕심부릴 것이다. 60살에도 멜로를 찍을 것이다”

언젠가 멜로의 주인공을 할 것 같아 요즘도 자기 대사만이 아니라 젊은 주연들의 대사도 연기해 본다는 연습벌레 이미숙. 그의 꿈은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후배들 앞에서 길을 넓혀 배우의 생명을 길어질수 있도록 한 그런 선배로 기억되는 것이란다. 절대 부질없는 꿈이 아니란걸 그도, 우리들도 안다. 그는 이미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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