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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경의 조연열전, 내가 주연이다] ‘쓰리데이즈’ 최원영

찌질한 마마보이(백년의 유산), 친구같은 아빠(상속자들)에 이어 이제는 섬뜩한 사이코패스(쓰리데이즈)다. 이처럼 최근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독특한 개성과 섬세한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배우 최원영의 변신이 놀랍다.

SBS 수목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 최원영은 재신그룹 회장 김도진 역할로 품격과 차원이 다른 사이코패스를 탄생시켰다. 최원영은 <쓰리데이즈> 1회에 등장한 후 한동안 출연이 없다가 뒤늦게 사건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면서 매회 묵직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재벌회장이란 지위, 고상한 얼굴에 숨겨진 악랄함을 연기하면서 새로운 악역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통령이 휴가를 떠났다가 납치된 후 3일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다룬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의 과거, 미국과 북한 등 국제관계, 재벌과 권력의 암투, 청와대 경호실과 특검, 대통령 탄핵 등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런데 국가 책임자인 대통령도, 무조건 충성해야하는 비서실이나 경호실 직원들도, 심지어 재벌 총수도 전형적인 인물은 아무도 없다. 이 드라마에서 손현주가 맡은 대통령 이동휘는 과거 미 군수업체 ‘팔콘’의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회사에 대한 충성심에 가득찼던 인물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17년전 무려 24명의 사망자를 남긴 양진리 참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를 속죄하기 위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있다.

사진|강윤중 기자

김도진은 그런 대통령 뿐 아니라 전 국민을 위협하는 존재다. 재벌인 그는 우리나라 최고위층과 결탁, 양진리 사건을 도모했다. 여기에는 미국 내 거대 권력도 포함돼 있다. 무서울 게 없는 김도진은 걸리적거리는 목숨은 단번에 없애버릴 정도로 냉혈한이고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코패스다. 양진리 사건을 일으키며 아무렇지 않게 민간인을 학살하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이들을 모조리 처단하지만, 그는 평소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며 그의 악마성을 감춘다. 궁지에 몰린 한태경(박유천)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그냥 보내드릴게요”라며 비릿하게 웃는 장면은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목숨까지 걸고 양진리 사건을 파헤치겠다는 대통령에, 아버지의 죽음에 숨겨진 의문을 파헤치는 경호관 한태경이 합심해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자 그의 뻔뻔함과 광기는 극한에 치닫는다. 청와대 경호실장(장현성 분)과 비서실장(윤제문 분)을 살해한데 이어 98년 양진리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북한 공작원 리철규(장동직 분)까지 부하를 시켜 죽였다.

그의 악랄함은 끝을 모른다. 비자금을 카드로 내세워 오히려 자신을 협박하는 대통령에게 분노하며 서울시내에서 대규모 테러계획을 세운다. 서울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버스들에 폭탄을 설치해두고 한꺼번에 터뜨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박유천과 여경 윤보원(박하선)은 기지를 발휘해 계획을 알아차리면서 대규모 테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김도진은 분노를 참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허술한 악인이 아니다. 윤보원의 차 안에 또 다른 폭탄 한 개를 숨겨뒀던 것. 다행히 윤보원은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가까스로 피했고 폭탄테러의 배후로 재신그룹이 지목되면서 그는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다. 분노한 김도진은 한태경에게 “내가 한태경 경호관을 죽이지 않겠다고 한 약속 깨야겠다. 지금부터 한태경 경호관, 여기 있는 여순경, 이동휘 대통령, 이차영 경호관까지. 내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모두 다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김도진은 더 큰 돈을 거머쥐기 위해 나라까지 송두리째 위험에 빠트리는 인물이다. 다른 드라마들에서 봐왔던 악독한 재벌들은 다른 기업을 망가뜨리거나 권력에 기생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최원영이 연기하는 김도진은 그들의 졸렬한 욕심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끝없는 야욕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최원영은 김도진을 연기하며 감정변화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와 말투를 유지한다. 하지만 광기에 사로잡히는 순간 만큼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차례 차례 손에 넣는 모습을 보여준다. 글로벌 기업의 회장답게 세련된 수트에 고상한 태도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악행이 드러나도 고상한 얼굴로 “사건을 입증할 확실한 증거가 있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기대된다”며 평온한 얼굴로 말을 해 상대방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한다.

드라마 ‘쓰리데이즈’ 속의 최원영. TV화면 캡처

모든 드라마에서 악역의 존재감은 매우 중요하다. 악역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선사하느냐에 따라 그 전체의 몰입도나 긴장감이 높아진다. 최원영이 연기하는 김도진은 이동휘가 농담처럼 한 말을 신앙처럼 듣고 옮긴 사실이 드러나 더욱 설득력이 있다. 당시 재신그룹을 막 손에 넣은 김도진은 컨설턴트였던 이동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남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돈을 벌고 싶다고 했고 이동휘는 “북한과 손을 잡고 제 2의 IMF를 일으키면 된다. 다만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미친놈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그는 진짜 ‘미친 놈’으로 변했다.

표정변화가 크지 않은 그이기에 더욱 섬뜩하다. 한태경에게 살인 누명을 씌울 때도 조용조용 나직하게 말하고 대통령을 압박할 때도 평소 말하듯이 자연스럽다. 언제나 여유있는 김도진의 얼굴은 그 부드러운 표정 뒤 숨겨진 악랄함을 더욱 강조한다. 장난감을 받아든 아이처럼 즐거운 표정을 짓다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장난감을 버리라는 것보다 더 가벼운 말투로 살인을 지시한다. 시청자들은 “최원영의 차분한 표정에 광기어린 눈빛이 소름돋게 만든다” “손현주에게도 절대 꿀리지않는 연기력” 등의 찬사를 보낸다.

대학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한 미술학도인 그는 27세에 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영화 <색즉시공>으로 데뷔했지만 오랜 무명시절을 보내다 2013년 MBC <백년의 유산>의 김철규 역할로 주목받았다. 전부인 유진에게는 스토커처럼 집착이 심하지만 어머니 박원숙 말에는 꼼짝 못하는 지질한 마마보이인데도 귀엽고 매력이 있어 ‘찌질파탈’(치명적 찌질이)이란 애칭을 얻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심이영과 결혼, 곧 아빠가 된다.

그는 대본을 받으면 역할 분석을 먼저 한다. <백년의 유산> 김철규도 비호감 종합선물세트인 성격이지만 ‘강한 엄마 밑에서 성장해 욕망을 분출하는 방법을 모르는 단순하고 우직한 남자’라고 분석한 후 나비넥타이를 매는 등 의상부터 유아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했다.

“출연작이 많진 않지만 매작품이 대표작이란 마음으로 연기합니다. 쉽고 편하면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식적인 게 싫어서 더 노력합니다. 제 노력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야 고통의 산물을 낳은 것 같거든요.”

최원영은 자신을 ‘광대’라고 칭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신명나게 한 판 놀아주고 거기에 즐거움과 자부심을 갖는 광대의 속성이 좋아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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