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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볼 PM 6:29]류중일의 상상과 세상에 없던 야구

지난 17일 잠실 LG-삼성전. LG가 6-2로 앞서던 7회말 2사 만루, 볼카운트 1B-2S에서 삼성 투수 차우찬이 공을 던지는 사이 3루 주자 박경수가 홈으로 뛰어들었다. 차우찬의 슬라이더가 왼손 타자 스나이더의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을 살짝 벗어나는 순간, 박경수는 홈 앞에 이르렀다.

얼핏 보기에는 아웃 타이밍이었지만 주심은 자신있게 세이프를 선언했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섰다. 아웃과 세이프를 놓고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항의는 길지 않았다. 류 감독은 이내 주심 판정에 수긍했다. 류 감독이 더그아웃을 나올 때의 기세와 달리 빠르게 발길을 돌린 것은 관중석의 반응 때문이었다. 류 감독이 홈플레이트로 달려나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이 관중석 반응이 귀에 선명히 들어왔다. “세이프가 맞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고 했다.

류 감독은 그 순간을 돌이키며 “글쎄, 우리가 이기고 있고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관중석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세이프가 맞냐’고 되물은 뒤 ‘알았다’는 액션을 하며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팀이 연패로 몰리고 있는 입장인 데다 경기마저 뒤지고 있어 판정 승복 퍼포먼스를 감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LG 박경수.

심판 판정은 정확했다. 더그아웃 쪽 시야에서는 아웃 타이밍에 가까웠지만, 박경수의 슬라이딩이 기가 막혔다. 박경수는 포수 먼쪽으로 슬라이딩을 하며 삼성 안방마님 이흥련의 태그를 피한 뒤 왼팔을 갈고리처럼 돌려 홈플레이트를 찍었다.

추평호 주심은 그 장면을 실사로 정확히 읽었고, 당일 입장 관중 1만8651명 중 적지 않은 팬이 그 장면을 느린 그림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심판 합의 판정제’(비디오 판독)가 실행되는 후반기 첫날 22일이면 그라운드에서 낯선 풍경이 자주 나올듯 하다. 류 감독이 상상한 ‘퍼포먼스’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중석의 반응과 벤치의 움직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액션이 나올 수도 있다.

어쩌면 프로야구에 ‘비디오 판독’은 이미 실행 중인 것과 다름 없었다. 오심 여부를 놓고 판정 번복만 없었을뿐 ‘오심 여부’를 대부분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판독기’라는게 따로 있어 심판들만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간 관중석의 야구팬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에 나오는 그 영상을 근거로 각팀의 벤치에서는 합의 판정 요청 여부를 결정하고, 또 그 영상으로 심판들은 최종 판정을 내린다. 영상 정보는 전자기기를 들여놓을 수 없는 더그아웃의 감독 또는 그라운드의 심판보다 관중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비디오 판독 대신 일명 ‘4심 합의제’로 부르고 있지만, 실상으로는 ‘3만 관중 합의제’가 실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봤던 프로야구와는 꽤 다른 프로야구가 이제 시작된다. 심판들로서는 결정적 판정에 대한 부담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이제 최종 판정의 몫을 세상의 모든 눈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깨가 무거운 쪽은 합의 판정 요청 타이밍을 잡아야 하는 각팀 벤치가 아닐까 싶다. 과연 어떤 장면이 쏟아질지 당분간 얘깃거리가 줄을 이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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