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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갈등을 넘어 진정한 제전이 된 아시안게임

인천아시안게임 개막
‘영원한 전진’을 모토로 평화와 화합을 다짐하는 아시아인의 잔치지만, 아시안게임이 늘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정치·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라 갈등과 분열도 있었고 대회가 무산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첫 대회가 열린 이후 이번에 17회째를 맞는 아시안게임은 위기를 겪으면서 한 번도 빠짐없이 4년마다 대회를 지속했고, 이제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45개 전 회원국이 참가하는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 제전으로 자리잡았다.

이스라엘과 대만은 아시안게임을 둘러싼 갈등의 상징적인 국가들이다. 1954년 제2회 필리핀 대회부터 출전한 이스라엘과 대만은 1962년 자카르타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들 선수단에 비자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의 갈등,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보이콧은 초창기 아시안게임의 큰 고민거리였다.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이 19일 인천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열려 개막을 알리는 축포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인천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이스라엘은 1966년 방콕 대회에 복귀하지만 결국 1978년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영원히 아시아를 떠났다. 오일 달러를 앞세운 중동 국가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아시안게임을 이끌어온 아시안게임연맹(AGF)이 OCA로 재편되면서 1981년 총회에서 제명됐고, 결국 유럽으로 스포츠 활동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대만은 중화민국이란 국명으로 초창기 아시안게임에서 활약했지만 1974년 제7회 테헤란 대회에 중국이 등장하면서 밀려났다. AGF는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대만을 쫓아냈다. 이후 대만은 한동안 아시안게임과 인연을 맺지 못하다가 1990년 베이징 대회에 정식 국기가 아닌 대만 올림픽기와 ‘중화 타이베이’라는 명칭으로 출전을 허락받았다.

1970년 대회를 유치하고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반납하는 시련을 겪은 서울이 개최한 1986년 대회에는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했으나 그 맹주인 중국이 출전해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높였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아시아권에서 독립국이 된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이 OCA에 가입했고 2006년 카타르 도하 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45개 전 회원국이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2010년 광저우, 2014년 인천 대회까지 전 회원국이 출전하는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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