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아시안컵] 차미네이터 ‘이라크 심판의 날’

위기의 순간에 가장 의지하는 것은 경험이다. 스포츠에서 베테랑이 대우받는 이유다.

한국과 이라크의 아시안컵 4강전을 앞두고 양팀의 ‘큰형’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차두리(35·서울)와 이라크의 유누스 마흐무드(32)다. 이들의 역할은 수비수와 골잡이로 다르다. 그러나 그라운드를 떠났다가 돌아왔으면서도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같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차두리는 ‘한물 간 선수’였다. 이번 대회에도 확실한 주전은 아니었다. 김창수(가시와 레이솔)의 뜻하지 않은 부상 때문에 출장 기회를 잡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지난 22일 우즈베키스탄전에서는 연장 후반 70여m를 드리블해 들어간 뒤 손흥민(레버쿠젠)의 쐐기골을 돕는 크로스를 올렸다. 수비수지만 3경기에서 도움을 2개나 올렸다. 아시안컵만 벌써 세 번째. 그는 나서는 경기마다 아시안컵 한국인 최고령 출전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평균 연령이 25.83세에 불과한 어린 대표팀에도 경험을 덧붙였다.

차두리 그래픽 합성 | 이은진 기자

팬들은 온라인에서 그의 대표팀 은퇴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본인은 “나이가 들다보니 몸의 회복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 그러나 모른다. 차두리는 2012년 독일 프로축구 뒤셀도르프와 계약을 해지한 뒤 그라운드를 떠난 적이 있다. 도서관과 영어학원에 다니며 공백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공 차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한국 팬들의 말에 국내 프로축구 K리그에 왔다.

차두리의 존재감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빛난다. 경기가 없을 때는 상대를 분석하거나 후배들의 ‘멘토’ 역할을 하는 게 일상이다. 큰 대회가 익숙하지 않은 후배들은 아예 자신의 방으로 불러 상담을 한다. 띠동갑 후배이자 수비수인 김진수(호펜하임)가 첫 출전한 아시안컵에서 전 경기를 풀타임 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차두리의 영향이 크다. 김진수는 “두리형이 제일 열심히 뛰는데, 우리가 열심히 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차두리는 쿠웨이트전이 끝난 뒤 경기력 논란으로 비판받던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동료들과 한국 축구의 힘을 믿는다는 글과 사진을 올리며 분위기를 바꿨다. 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61)이 “베테랑은 단순히 경기가 안 풀릴 때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팀 전체를 이끈다는 사실을 차두리가 입증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 이유다.

마흐무드는 이라크의 국민적 영웅이다. 2003년 발발한 미국과의 전쟁 때문에 출전이 불투명하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팀의 4강 진출을 주도했다. 이어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준우승과 2007년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었다. 전쟁으로 힘들어하던 이라크 국민들은 그에게서 용기와 희망을 봤다. 그는 이라크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A매치(135경기)를 뛰며 53골을 넣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이번 아시안컵 가이드북에서 마흐무드를 ‘젊은 선수들의 멘토이자 힘까지 불어넣는 부적’이라고 했다. AFC는 “마흐무드가 늙어서 예전처럼 제일 위협적인 스트라이커는 아닐지 몰라도 이라크 팀에서 그의 중요성은 조금도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AFC의 설명대로 마흐무드는 늙었다. 2013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알 아흘리(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잠깐 뛰었을 뿐 1년 넘게 소속팀이 없다. 국가대표로만 뛰고 있는 그가 팔팔한 후배 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지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중요성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선발로 나섰고, 팔레스타인전에서 골도 넣었다. 이란전에서도 그는 ‘승리의 부적’이었다. 후배들을 이끌며 연장 전반 팀의 두 번째 골을 뽑기도 했다. 그가 이 골을 넣은 뒤 지팡이 세리머니를 한 것은 ‘나는 살아있다’는 의미였다.

상단으로 이동 스포츠경향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