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생(完生)으로 가려는 몸부림이었어요.”
배우 문채원(29)은 정적인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웬만해서는 얼굴색이 잘 바뀌지 않는다. 취미 또한 그렇다. 여행을 다니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활발한 일보다는 혼자 갈무리해뒀던 영화를 즐겨보고 명상에 빠지는 일을 좋아한다. 그를 잘 알거나, 그와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스크린 속 그의 모습에 충분히 깜짝 놀랄 만하다. 박진표 감독의 영화 <오늘의 연애>에서 그는 술도 잘 마시고, 욕도 잘 하고, 주먹도 잘 휘두른다. ‘남자 사람 친구’를 18년 동안 곁에 두고 마음을 줄 듯 안 줄 듯 애태우는 일도 잘 한다. 마치 2000년대 초반 <엽기적인 그녀>에서의 전지현 캐릭터가 2014년 다시 살아난 느낌이다.
하지만 문채원은 이 연기를 ‘연기영역을 넓히는 일’이라고 했다. 발랄하고 로맨틱코미디에 어울리는 연기를 했을 때 그가 얼마만큼 나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도전해보는 의미였다. 발랄한 연기를 스스로 ‘도전’이라고 말할 만큼 그는 발랄함과는 거리가 멀다. 로맨틱코미디도 썩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인지 모를 그의 연기영역을 가늠하는 일에서 이번 영화는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오늘의 연애’에 대한 생각부터 영화 속 김현우와 파열음을 냈다.
“‘오늘의 연애’는 제가 봤을 때 ‘사랑을 찾는 몸부림’이에요. 영화는 홍보에 ‘썸’을 썼지만 사실은 우정에 대한 영화에요. 이성이 친구가 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연인이 될 수 있음을 보인 거죠. 진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썸’을 기대한 분들은 실망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어요.”
‘썸(Some)’은 남녀 간 호감의 감정을 일컫는 ‘썸씽(Something)이 있다’의 줄임말이다. 남녀가 정식으로 교제를 하기 전 호감을 가지며 밀고당기기를 하는 과정을 통상적으로 일컫는다. 문채원의 생각은 ‘썸’을 통해 드러나는 요즘 연애의 보수성을 질타하는 쪽으로 옮겨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연애에 이어 따라오는 슬픔은 두려워하지만 연애의 절정은 맛보고 싶어하고…. 그러한 감정이 모여 ‘썸’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 단어의 정의를 ‘사귀기 전 알아가는 단계’라고 하면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진짜 연애가 두려워 이 사람, 저 사람과 ‘썸’을 타는 데만 집중한다면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과연 시집가고, 장가를 갈 수 있을까요? 알아가는 게 두렵다면 ‘썸’타는 이런 행동 하지말고, 서로에 대해 오랜기간 살펴보는 게 필요해요. 연애에 있어서도 보여요. 보수성이.”
영화 속 문채원이 연기한 김현우는 인터넷에서 뜬 미모의 기상 캐스터로 지상파 방송으로 데뷔해 큰 인기를 얻는다.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온 강준수(이승기)가 있다. 둘은 정말 서로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동성친구처럼 지내지만 어느새 자신들 안에 들어찬 사랑의 감정을 직감한다. 물론 이 여정이 쉽지는 않다. 두 사람은 오해하고, 반목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또 서로를 그리워한다. 남녀 간의 이런 관계는 과연 가능할까.
“일을 시작 한 후에 사귄 이성 친구가 두 명 정도 있어요. 극중 준수처럼 저한테 딴 마음을 가진 친구들은 아녜요. 6~7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우정이 깨지지 않은 이성 친구가 둘이나 있는 셈이니까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현재까지는 믿고 있어요.”
데뷔 후 지금까지 문채원은 드라마 <공주의 남자> <착한 남자>, 영화 <최종병기 활> 등에서 진중한 연기를 주로 했다. 실제로 성격도, 좋아하는 영화 취향도 그런 쪽과 맞다. 하지만 일로 계속해오니 스스로 소진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2013년작 드라마 <굿닥터>부터 발랄한 연기를 했다. 로맨틱코미디물은 원래 즐겨하지 않았지만 “20대가 가기 전 한 작품 정도는 남겨놓는 게 어떻겠냐”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이 연기가 대단한 변신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를 꾸준히 봐주신 분들에게는 익숙한 이미지일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이런 이미지가 있는 걸 모르는 분도 많아요. 이런 이미지를 좋아해서 다가오시는 분들을 지켜보는 일도 재미있는 것 같아요.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공부하듯 접근하진 않았어요. 이런 작품도 하면 나중에 제 연기를 설명할 때 ‘밝은 역할도 가능하다’는 말을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말인 즉 슨 이번 김현우는 문채원 연기의 발랄함, 생기 등의 면에서는 정점을 찍은 연기였다. 마치 달 표면에 우주왕복선으로 도착해 깃발을 꽂는 일 같았다. 다음에는 다른 이미지로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이미지로 문채원은 자신의 연기 지평을 넓히는데 아니 지평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데 노력할 참이다. 그리고 다음은 그 안을 채울 차례다.
“조규장 감독의 <그날의 분위기>란 영화를 찍었어요. 말 그대로 평범한 흐름의 영화에요. 바람둥이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기차 로맨스…. 일상적인 연기가 중요한 작품이에요. 평범한 감정의 영화는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180도 다를 수 있잖아요. 제 연기를 제가 보고 싶어서 출연했어요. 감정을 몰아붙이는 연기는 누구든 할 수 있잖아요. 섬세한 감정연기로 제 안을 채워보고 싶어요. 그리고 다 찍고 나면 정말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거예요.”
연기로 이제 8년차 문채원은 올해도 스스로의 연기 외연을 넓히고 그 속을 알차게 채우며 완생으로 가는 일에 매진할 계획이다. 문채원의 배역이나 연기를 보면서 깜짝 놀랄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있을 예정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