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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상회’ 강제규 감독 “내 영화의 지향점도, 한국영화의 미래도 결국은 ‘사람’” [인터뷰]

강제규 감독(53)의 영화에는 그동안 육중한 탱크나 자욱한 포연 그리고 빗발치는 총알이 주연이었다. 분명 사람을 그리는 영화를 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선굵은 액션대작을 주로 연출했던 탓에 진짜 하고 싶었던 사람과의 소통에는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 장르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연출했기에 얻었던 영광도 있었다. 영화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가능성을 열었고,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인미답의 고지인 1000만 관객 흥행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 후로 10년, 강산은 변했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도 변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작법과 형식을 가진 영화 <장수상회>를 들고 왔다. 이제부터는 왠지 영화인으로서 ‘민낯’을 대중에게 보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의 마음은 마치 처음 연출을 하고 영화를 공개할 때처럼 떨리고 있었다.

박근형-윤여정 주연으로 70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장수상회’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첫 영화가 <은행나무 침대>(1996)였어요. 판타지에 기반한 사랑 이야기였는데 ‘천년의 사랑’을 콘셉트로 갖고 연출했죠. 늘 일상적이지 않은, 다른 시선의 영화에 관심이 많고 매력을 느껴요. 이번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해요. 젊은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는 많지만 70대의 사랑을 다룬 영화가 많지 않다는 점이 매혹적이었어요. 진부하거나 식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주제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장수상회>는 서울 수유동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마트 ‘장수상회’를 배경으로 꼬장꼬장한 성격의 노인 성칠(박근형)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고운 미모의 여인 금님(윤여정)으로 인해 조금씩 변해간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이미 9일 개봉 후 많은 관객들이 그 여운을 느꼈지만 막바지에는 성칠 만 모르고 있던 그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육중한 감정의 파도가 밀려온다. 박근형-윤여정이라는 캐스팅이 좋았고 많은 영화와 드라마, 예능을 통해 노년의 사랑에 대중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생겼지만 상업적으로는 여전히 우려가 큰 기획이었다.

박근형-윤여정 주연으로 70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장수상회’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첫 번째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제 개인적인 상황하고 비슷했어요. 부모님이 <장수상회>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거든요. 영화를 보고 운적은 많지만 시나리오를 보고 울었던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핸디캡이 많은 영화잖아요. 처음부터 이 영화를 하면서 ‘흥행은 기대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앞으로 이런 기획이 좀 더 자신감있게 진행되려면 존재감을 갖게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꼭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강제규 감독 영화인생의 전환점은 아이러니하게도 2011년 개봉작 <마이웨이>로 봐야할 것 같다. <태극기 휘날리며> 1200만 관객의 기대치를 한껏 안고 기존 영화 세 편을 찍을 수 있는 일정인 160여 회차의 촬영을 진행하는 등 국제적 프로젝트로 관심을 모았던 작품은 전국관객 215만명도 못 채우고 흥행에서 참패했다. 그는 이 무렵 SF(공상과학) 장르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미국으로 갔다. 할리우드에서 잠시 연출을 떠나 객관적으로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산업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챙겼다. <마이웨이>가 성공했다면 그는 또 다시 다음 프로젝트로 내몰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에서 모든 기득권을 놓고 배우는 학생의 자세로 영화를 맞이했다.

박근형-윤여정 주연으로 70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장수상회’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할리우드는 창작하는 사람들이 참 ‘놀기 좋게’ 돼 있어요. 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여건이 있죠. 특히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좋은 터전이에요. 엔딩 크레딧만 따져봐도 연출자보다 작가가 먼저 나섭니다. 프로듀서보다 작가를 존중하는 풍토가 있으니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가진 작품이 끊임없이 양산됩니다. 그리고 당연한 보상도 있고요. 이게 바로 할리우드의 힘이라고 느꼈어요.”

결국 그가 평소 강조했던 ‘사람의 힘’이 영화를 지탱하는 모습이었다. 우리영화는 그동안 영화 제작의 당위가 감독 개인의 역량보다는 시스템 중심으로 바뀌었다.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많은 사람이 참여해 상업적 성공에 대해 평점을 매긴다. 그런 과정에서 감독 또는 작가만의 독창성은 좌절되기 일쑤다. 사람이 만든 시스템이 되려 사람을 제압하는 환경이 된 것이다. 강 감독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렴풋이 한국영화의 지향점도 깨달을 수 있었다.

박근형-윤여정 주연으로 70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장수상회’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출발은 결국 시나리오거든요. 시나리오에 투자해야 하고,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가치기준이 바뀌어야 하죠. 우리는 시나리오 작가 부분에 있어선 많이 취약해요. 결국 능력있는 작가들이 작가로 남지 않고 연출자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명예나 경제적인 부분에서 취약하기 때문이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잠시 다른 요소에 가려지기도 했지만 강 감독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장수상회>를 하면서 비로소 촬영장에서 배우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는 것은 기쁨이었다. 그는 지난해 28분짜리 단편영화 고수, 문채원 주연의 <민우씨 오는 날>을 연출하는 등 작고 가벼운 느낌의 영화로 노선을 변경하고 있었다. 아니 노선변경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가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지향점에 다가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박근형-윤여정 주연으로 70대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장수상회’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성장하면서 특정 감독이나 장르에 열광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첫 영화를 판타지, 첩보 액션 등을 하고 싶어서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었는데 그게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전부로 흘러가는 분위기더라고요. <장수상회> 같은 영화나 <첨밀밀> 같은 사랑 이야기도 관심이 많아요. 앞으로는 그렇게 제 안에 있는 다양한 세계를 그리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이유로 영화 연출이 뜸했던 그는 <장수상회>를 기점으로 좀 더 짧은 기간에 다양한 작품을 만들 작정이다. <마이웨이>의 실패는 오히려 <장수상회>의 시작과 ‘대작전문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게 해줬다. 몸보다 큰 완전군장을 지고 거친 벌판을 뛰던 그의 영화세계가 단화를 신고 동네로 나들이를 나가는 가벼운 발걸음처럼 변해갈 것이다. ‘거장’의 발걸음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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