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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천재’ 염고은의 부활 “3년 안에 한국신 목표”

한국 마라톤은 위기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간판 이봉주가 은퇴한 이후 남자 마라톤은 2시간 10분대 이내에 들어오는 선수가 나오지 않는 침체에 빠졌다. 여자 마라톤 역시 권은주가 1997년에 세운 한국신기록(2시간26분12초)이 18년째 요지부동이다.

뚜렷한 유망주가 보이지 않는 남자 마라톤은 케냐의 철각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의 귀화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반면 여자 마라톤은 긴 침체기를 뚫고 나온 샛별의 부활에 기대를 걸고 있다. 고교 1학년 때 5000m 한국신기록(15분38초60)을 세우며 혜성처럼 등장한 ‘육상 천재 소녀’ 염고은(21·삼성전자)이 침체와 방황을 딛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 염고은은 지난 5일 열린 대구 국제마라톤에서 국내부 1위에 오르며 부활의 날갯짓을 했다. 마라톤 풀코스 두 번째 도전에서 염고은은 2시간34분 41초를 찍었다. 긴 방황과 부진의 터널을 뚫고 나온 염고은을 봄꽃이 만발한 경기도 화성의 삼성전자 육상단 훈련장에서 만났다.

대구 국제마라톤 여자부 국내 1위에 오른 염고은이 스포츠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고교 1학년때 한국신기록을 세운 육상 천재소녀 염고은은 긴 방황의 터널을 지나 마라톤 한국신기록을 목표로 다시 질주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육상단 제공

■방황 딛고 다시 일어선 천재

염고은은 대구 대회를 떠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말했다. “지난해 가을, 처음으로 춘천 마라톤에 도전해 완주하면서 약간 자신감은 생겼어요. 이번에는 36분 정도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34분이 나왔어요.”

염고은은 지난해 10월 춘천 마라톤에서 풀코스를 처음 뛰어 2시간43분34초의 기록으로 국내 선수 가운데 1위로 골인했다. 기록은 썩 좋지 않았지만 마라톤 데뷔전에서 1위에 오르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염고은은 두번째 대회인 대구 국제대회에서는 무려 9분을 단축시키며 또 다시 국내부 1위에 올랐다. 올 시즌 국내 선수 전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기나긴 침체의 시간을 보내온 염고은은 이제 안정과 자신감을 찾은 얼굴이었다.

그는 김포제일고 1학년 때인 2010년에 세웠던 한국신기록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때 5000m를 처음 뛴 대회에서 기록을 세워서 저도 놀랐고 부담스러웠어요. 기록 세운 뒤 지도하던 코치님이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 있었고,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힘들어 많이 흔들렸어요. 마음이 흔들리니 기록도 안나왔고 운동에 흥미도 떨어졌고 방황도 했죠. 고3 때는 운동을 안하겠다고 했었고….”

한국 여자육상 장거리를 이끌 천재 소녀로 너무 일찍 주목을 받은 것이 그에겐 득이 아닌 독이 됐다. 사춘기까지 겹친 10대 소녀의 부진과 방황은 길었다. 그런 그를 삼성전자 김용복 코치가 손을 내밀어 보듬었다. 그대로 사장하기엔 그의 재능이 너무나 아까웠다. 김용복 코치와 황규훈 감독은 염고은이 서서히 다시 운동에 흥미를 느끼고 부담을 덜고 회복할 수 있게 오랜 기간 기다렸다. 전문적인 훈련 대신 운동에 다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년 가까이 천천히 몸을 만들도록 했고 마라톤 전향을 이끌어냈다.

소속팀의 배려 속에 염고은도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의 몸속에 있는 육상에 대한 본능이 다시 꿈틀댔다. 첫 풀코스 도전을 무난히 마친 뒤 그는 이번 대구 대회에서 2시간34분대의 좋은 기록으로 천재 소녀의 부활을 확실히 알렸다.

지난 5일 대구 국제마라톤에 출전한 염고은이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 육상단 제공

■“3년 안에 한국 신기록 목표”

161㎝·49㎏인 염고은은 5000m 신기록 선수답게 스피드가 뛰어나 향후 기록 단축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황규훈 감독은 “고은이는 주법이 아주 경제적이어서 마라톤 선수로서는 이상적이다. 스피드는 기본적으로 있는 선수이고, 전문체력만 더 끌어올리면 몇년 안에 충분히 세계와 경쟁할만한 선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남자 마라톤이 케냐·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선수들의 엄청난 스피드를 앞세워 기록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지만 최근 여자 마라톤은 주춤한 상황이다. 국제대회에서도 2시간25분 대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하향 평준화 추세에 있다.

한국 마라톤으로서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세계와 경쟁할 만하다. 한국은 2시간27분 20초의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는 김성은(26·삼성전자)이 최근 몇년간 선두에서 여자 마라톤을 이끌고 있다. 염고은은 소속팀 선배인 김성은과 함께 훈련하며 언니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더 큰 목표를 꿈꾸기 시작했다.

“아직 마라톤 경험이 많이 부족해 언니가 해주는 조언이 정말 큰 도움이 돼요. 음…3년 이내에 한국 기록을 깨고 싶어요. 운동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난 몇년을 지나오면서 정말 크게 느꼈어요. 이젠 마음을 다잡았으니 몸만 잘 만들면 될 것 같아요. 내년 리우 올림픽도 기대돼요.”

황규훈 감독도 “내년에는 20분대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후엔 한국 기록 경신도 도전해 볼만하다”고 거들었다.

스포츠계에서는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고도 사라진 선수가 적지 않다. 멘털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다. 염고은도 고교 시절엔 그랬다. 그러나 그는 실패와 방황 속에서 다시 일어설 동력을 찾아냈다. “이젠 관심과 기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같아요.” 방황을 딛고 일어선 염고은의 마음은 넓고 깊어졌다. 잊힌 육상 천재 염고은의 질주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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