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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차이나타운’ 엄마역 배우 김혜수…네가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해 봐? “30년 연기 소통이 ‘롱런’ 비결”

“증명해봐. 네가 쓸모 있다는 증명.”

한준희 감독의 영화 <차이나타운>은 시작하자마자 관객을 내리누르는 듯한 김혜수의 대사가 들린다. 여기서 ‘쓸모’란 극중 배경인 차이나타운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의 전부다. 모든 외모와 이성 그리고 감정보다 훨씬 앞서는 이 ‘쓸모’는 마치 영화에 출연한 김혜수의 역할을 보여주는 듯하다.

데뷔 후 지금까지 어떤 역할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여성성은 간직했던 김혜수가 이를 보란 듯이 던져버렸다. 하얗게 새어버린 구불구불한 머리, 기미와 주근깨 각종 피부 각질이 엉킨 볼품없는 피부 그리고 어그적어그적 걸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불록나온 배 그리고 앙상한 팔, 다리. 김혜수가 <차이나타운>에서 연기한 ‘엄마’는 자신의 사업을 결심하고 결행하게 하는 데 필요없는 모든 요소는 깡그리 퇴화시켜버린 ‘쓸모’의 극치였다. 극중 그는 딱 필요한 말, 필요한 행동만 한다. 하지만 관객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지구가 멸망해도 마지막에 남아 있을 듯한 느낌의 엄마를 연기한 김혜수는 발그레 웃으며 배역을 설명했다.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란도를 떠올렸어요. 분위기가 중요했죠. 낯설고 불편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주는 공기…. 연기의 핵심은 표정이나 대사 톤이 아니었어요. ‘엄마’라는 인물을 관객들이 처음 봤을 때. ‘우연히 이런 사람을 본다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하는 인상을 관객들이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차이나타운>은 극중 배경이 되는 ‘차이나타운’을 막후에서 쥐고 흔드는 인물 엄마와 지하철 물품 보관함에서 갓난아기 때 발견된 이후 연고도 이름도 없이 오로지 강자의 ‘쓸모’를 채워주기 위해 성장한 일영(김고은)이 만들어내는 여성판 ‘버디 무비’였다. 줄거리는 분명 이렇게 흐르지만 관객들은 김혜수의 낯선 모습에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다.

“특수 분장으로 피부를 만들었는데 거기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아요. 분장을 두세 시간 정도 하면서 세심한 부분까지 연출하는데 자연스럽게 분장을 하는 과정 속에서 엄마가 돼 갔어요. 엄마 역시 생존만을 강요당하는 환경에서 자랐죠. 그랬다면 안팎으로 얼마나 감정이 피폐해졌을까. 과연 그런 사람에게 여성성은 존재할까. 건강하게 살이 오른 느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몸매를 만들고 싶었어요. 실제 그런 몸매라면 어떻게 걸었을까, 앉았을까. 직접 다 연기를 해보는 거죠.”

약간의 보형물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엄마의 걸음은 느리지만 조용한 긴장감이 있었고,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섰으며, 표정은 텅 비어 보였지만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강한 인물을 담은 김혜수 자신에게는 영향이 없었을까. 그의 30년 연기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작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제 스스로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에요. 당연히 시작하기 전에는 힘들죠. 하지만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는 오로지 엄마에만 집중했어요. 물론 밝고 아름답기보다는 가슴을 억누르는 슬픔이 있었지만 영화 촬영을 하면서 그 감정을 유지했다든지, 지배됐다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보통 어떤 일을 오래 해오면 분명 분기점은 오기 마련이다. 이를 여배우에게 적용하면 때가 되면 기혼을 연기하거나, 또 때가 지나면 모성을 연기하고 그러다가 서서히 노역을 맡는 식이다. 하지만 김혜수의 연기는 늘 그러한 도식적인 분리를 거부해왔다. 그가 최근에 한 연기만 따져도 그는 전지전능한 비정규직 사원(<직장의 신>)이었고, 섹시한 매력을 갖춘 금고털이(<도둑들>)였다. 그리고 날이 선 잡지사 기자(<스타일>)였다가 따뜻한 심성과 실력을 겸비한 정신과 의사(<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김혜수는 늘 어떤 역을 선택하고 구현할지 기대감을 준다. 그 세월이 벌써 30년이 됐다.

“여성으로서 그렇고 그런 캐릭터로 소구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로 남을 수 있는 여지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의 전면으로 나서는 것보다 그게 중요하죠. 비록 짧게 나왔지만 영화 <관상>에서도 연홍 역인 제가 여성으로는 유일했잖아요. 작품이 좋아도 캐릭터가 뚜렷하지 않으면 마음에 당기지 않아요. 뭔가 해볼 여지가 없거나, 연기할 게 없으면 재미가 없죠.”

그가 생리적인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히 젊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마음가짐에 있었다. 그는 그가 연기를 한 시간과 비례해 노련미가 는다고 믿지 않고 있다. 또한 어떠한 작품이든 그 캐릭터와 소통하고 상대 배우와 소통하며, 심지어는 연출자와의 길고 지난한 소통의 과정을 통해 캐릭터가 생긴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배역이든 홀연히 몸을 던질 수 있고 이번 영화처럼 연출자가 신인 감독이라고 우려하거나 미리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늘 열려 있는 모습이 김혜수 ‘롱런’의 비결이었다.

“의사 소통이 다르면 제가 좀 더 다가가면 돼요. 소통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하는 거지. ‘방식이 다르다’고 하는 말은 결국 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아요. 전 제가 궁금하거나 하고 싶으면 해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혼자 생각을 싸안고 있거나 이러질 못해요. 그래서 영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면 늘 도전하게 되죠. 우리가 흔히 가늠할 수 없거나 익숙하지 않은 연기 그리고 제가 좀 환기가 될 만큼 자극이 되는 역할이 좋아요.”

그는 인터뷰 이후 <차이나타운>이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데뷔 후 처음으로 칸 레드카펫에 설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예정됐던 미얀마 봉사를 홀연히 떠났다. 칸 영화제의 무게감과 그의 레드카펫을 바라보는 대중의 기대에서도 그는 자유로웠다.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설익은 판단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김태곤 감독의 <가족계획>에서 여배우 역으로 스스로의 민낯을 들여다볼 요량이다. 좋은 배역이라면 어디에라도 기꺼이 떠나는 호기심 많은, 소녀 같은 김혜수, 그에게 베테랑이라는 헌사를 쉽게 갖다 붙이는 일은 고루한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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