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로맨틱 코미디였다. 지난해 1월14일 개봉한 <오늘의 연애> 이후 문채원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딱 1년 만인 14일 개봉하는 조규장 감독의 <그날의 분위기>에 출연했다. 이승기와 호흡을 맞췄던 그는 다시 유연석과 달콤한 연인연기를 하면서 어느새 자신을 ‘로맨틱 코미디’ 전문배우로 올려놨다. 그런데 출연하는 영화와 자신의 이상이 반드시 맞지만은 않다. 일상적인 감성이 들어가는 영화를 즐기는 문채원이지만 마음속에는 또 다른 변신의 욕구 또한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데뷔 후 줄곧 비극적인 운명을 연기하던 문채원, 그리고 지금은 달콤한 로맨틱코미디 연기를 연이어하는 문채원, 그러나 <내부자들>을 좋아하고 땀 냄새 또는 피 냄새(?) 가득한 변신을 꿈꾸는 문채원. 우리는 어떤 문채원을 기대하고 기다려야할까.
“캐릭터를 고를 때 배우 입장에서는 평범한 캐릭터가 마냥 좋은 건 아니죠. 히스테릭하다거나 트라우마가 있다거나 연기할 거리가 많으면 좋죠. 하지만 수정이는 둥그런 캐릭터에요. 많은 분들이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자기방어를 하는데 애쓰지 않을까 싶었어요. 큰 스크린에서 꼭짓점이 없는 캐릭터를 연기해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도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문채원이 연기하는 수정은 화장품 브랜드 회사에 근무하는 인물이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부산에 가는 KTX 열차에 탔다가 옆 자리에 말끔한 외모의 스포츠 에이전시 재현(유연석)을 만난다. 그런데 그가 대뜸 내놓는 말이 황망하다. “저 웬만하면 오늘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바로 112에 신고해 현행범 체포가 옳을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말에 당황하던 수정이 자연스럽게 재현에게 동화되면서 ‘특별한 하루’로 나아간다.
“당연히 현실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죠.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고 싶어요’와 ‘자려고요’는 다르잖아요. ‘자고 싶어요’는 백배 후퇴해서라도 순수하게라도 볼 수 있지만 ‘자려고요’는 자신감의 표현인 거죠. 결국 수정이가 내성적인 인물로 그려지긴 하지만 전 자신감이 떨어진 인물로 봤어요. 사실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장면에서는 자신감도 보이거든요. 특별한 분위기의 하루를 다룬 이야기인 거죠.”
지금까지 문채원은 윤상현, 박시후, 박해일, 송중기, 주원, 이승기 등의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그런데 누구와도 무난하게 어울린다는 의미로 ‘화학작용’을 뜻하는 신조어 ‘케미’를 이용한 ‘케미 여신’으로 불렸다. 유연석과의 첫 만남이었지만 그는 또한 남자배우의 날카로운 면을 부드러운 얼굴선의 소유자답게 끌어안으면서 호흡을 만들어냈다.
“(유)연석 오빠의 경우는 <응답하라 1994>는 못 봤어요. 영화 찍기 전에 봤던 영화가 <화이> <늑대소년> 등의 작품이었어요. 되게 세보이더라고요. 그런 오빠가 바람둥이 역할을 하니까 나름은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순애보를 가진 <응답하라 1994>를 봤다면 오히려 지금의 캐릭터가 잘 안 떠올랐을 수도 있겠어요. 결국 상대역과는 시너지를 함께 내는 거죠. 그 사람이 내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제가 내는 열정이 합해졌을 때 나오는 것. 절대 저 혼자 만드는 호흡은 아니에요.”
문채원은 여느 배우들이 그렇듯 영화나 드라마 보는 일을 즐긴다. 그런데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하고, 작품에 빠질 때는 하루 종일 정신없이 빠져든다는 점에서는 조금 더 높은 기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는 선 굵은 느와르나 시대물 또는 긴장감이 넘치는 장르물 등을 즐긴다. 연이은 로맨틱 코미디 선택은 기자에게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했다. 문채원은 이 부분에서는 ‘현실론’을 폈다.
“각자의 선호 장르는 다르겠죠. 당연히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을 거고…. 저 개인적으로는 스릴러나 드라마틱한 장르를 좋아해요. 갑자기 변신을 한다고 하면 나름의 어색함이 있으니까 여배우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장르를 택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최근에 영화 <내부자들>을 재밌게 봤어요. 남자분들이 계속 나오고 조직폭력배, 형사, 검사 등 주제는 마찬가지지만 나올 때마다 먹힌다는 건 수요가 분명히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극장가는 목적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든다는 평가도 있지만 일단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잘 해야 하는 거죠.”
문채원은 <내부자들>의 매력에 흠뻑 빠진 듯 했다. 극중 조상무 역을 맡은 조우진의 극중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따라하는가 하면 이병헌의 각종 대사들도 외워냈다. 근래 열심히 본 미국 드라마 역시 <아메리칸 스나이퍼>나 <한니발> 등이다. 아직은 즐겨보는 작품과 자신이 나와야 하는 작품이 다른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용기있게 돌파할 수는 없을까. 이제 서른이 된 문채원, 변신의 필요는 생겼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가 혼자서 생긴 고민이다.
“예전 데뷔 시절에 제 나이보다 많은 인물들을 연기했어요. 그리고 무겁고 감정이 많이 쓰이는 연기를 했죠. 그때는 그렇게 신파적인 느낌이 좋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를 한 이후에는 좀 밝고 희망을 주는 캐릭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택한 게 <굿닥터>나 <오늘의 연애> <그날의 분위기>같은 작품이죠.”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문채원의 눈빛에서는 언뜻언뜻 변신의 열망이 읽힌다. 문채원이 싸늘한 표정으로 음모를 사주하거나, 모두를 전율하게 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이런 경우는 배우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또 다른 관점과 시선을 가진 제작자나 연출자의 용기도 필요하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작품도 하고 싶고요. 뭔가 다른 느낌의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서른이 되면 뭔가 하나의 여성성이 완성될 줄 알았는데 완숙미, 농익은 느낌이 오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 얼굴선이 부드럽다고 하시는데요. 그래도 저는 뭔가 제 인생에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꼭 만났으면 해요.”
그는 지금 드라마 <굿바이 미스터 블랙> 촬영을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거칠지만 또 발랄한 역할이다. 이 드라마를 마치고나면 문채원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또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