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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덕후’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 가방에 수학문제집이 들어 있는 이유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특정 분야에 대한 광적 애호가)가 변형된 은어다. 현실 도피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했지만 최근에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뜻이 더 강하다. 특정 분야에 대해 열중하는 행위는 ‘덕질’이라 불린다. ‘덕질’은 ‘조건없는 열정’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만약 그 ‘덕질’이 조건을 채우고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이어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른바 ‘덕업일치’는 덕후 세상 최고의 축복이다.

프로배구 남자부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40)은 ‘배구 덕후’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배구뿐이다. 충남 천안의 현대캐피탈 선수단 숙소에는 회의실이 여러개다. 감독실 불이 켜 있으면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신경쓸까봐 저녁이 되면 2층 회의실로 옮겨 배구를 보고, 배구를 그려보고, 배구를 생각했다. 2층이 트레이닝 룸과 가까워 그게 또 신경 쓰였다. 요즘에는 아예 3층 회의실에 숨어서 배구를 본다. 취침 시간은 정해져있지 않다. 최 감독은 퀭한 눈으로 “밤을 새기도 한다”며 허허 웃었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이 감독실에서 태블릿에 담긴 전력분석프로그램을 살피고 있다. | 이용균 기자

27일 천안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현대 캐피탈 구단 숙소 이름)에서 만난 최 감독은 ‘배구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솔직히 잘 모르겠다. 30년 넘게 배구를 해왔다. 그냥 배구가 좋다”고 말했다. 굳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남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와 이유를 느끼지 않는 경지. 진정한 ‘덕후’의 경지다.

현대캐피탈은 프로배구 V리그 출범 이후 매 시즌 삼성화재와 우승을 다투던 팀이었지만 지난 시즌 5위로 추락했다. 외국인 선수 아가메즈의 부상과 부진도 이유였지만 팀 전체가 삐그덕댔다. 현대캐피탈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호철 감독도 결국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팀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베테랑 세터 최태웅은 곧장 선수에서 감독이 됐다. 39세 감독의 선임은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최근 보기 드문 일이었다. 패기와 신선함은 30대 감독의 매력이지만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다잡는데는 경험이 부족할 위험성이 있었다.

최 감독은 옛 감독들처럼 ‘어떻게 선수들을 잡을 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배구’ 선수였다. 모두들 배구를 좋아한다. 배구를 고민하면, 선수들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최 감독은 배구에 집중했다. 첫 단계는 잘 알려진대로 스피드 배구였다.

최 감독은 연습 코트에 4개의 선을 그렸다. 네트 중간 3분의 2, 세터의 토스 포인트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을 만들었다. 그 사이를 ‘퀵 존’이라고 이름붙였다. 최 감독은 “퀵 존은 세터가 토스를 보내는 거리가 같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토스가 이뤄질 경우 속공이 가능하다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선수들의 ‘속공’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다. 현대캐피탈의 배구는 리시브-토스 뒤 4명의 선수가 동시에 움직인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여러 명의 공격수가 동시에 팔을 휘두르는 경우도 많다. 문성민이 후위에서 날아올라 속공 타이밍의 토스를 때리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상대 블로커들은 누구를 막아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프로배구 현대캐피탈의 연습 코트. 최태웅 감독은 코트에 부채꼴 모양을 그리고 퀵존으로 이름붙였다. 스피드 배구의 기본 바탕 개념이다. | 이용균 기자

스피드 배구를 위해서는 미리 계산해야 할 부분이 많다. 최 감독은 “경기 중에는 데이터 보다 ‘직관’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그 직관을 키우는 것이 바로 데이터다”라고 말했다.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의 조합이 아니다. 배구의 방향과 경향, 습관이다. 이를 위해서는 배구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 ‘배구 덕후’ 최 감독의 ‘덕질’은 이 지점에 존재한다. 하루 종일이라도 회의실에 처박혀서 배구를 볼 수 있다. 최 감독은 “우리 경기는 당연히 다시 봐야 한다. 중계화면을 보고, 우리가 찍은 전력 분석 화면을 본다. 경기 없는 날은 다른 팀 경기를 본다. 전력분석원이 모든 경기를 직접 가서 촬영한다. 중계화면, 촬영화면을 통해 살핀다. 우리 훈련 장면 촬영분도 다시 봐야 한다. 훈련 때 어떤 경향이 드러나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쉼없이 털어놓았다.

최 감독은 ‘비밀 장부’를 꺼냈다. 상대 팀의 모든 경기가 깨알같이 적혔다. 보안을 위해 암호화시켰다.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알파벳과 숫자가 잔뜩, 난수표처럼 얽혔다. 최 감독은 슬며시 웃었다. 소장품, 수집품을 자랑하는, 딱 ‘덕후의 미소’.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 | 이용균 기자

데이터는 배구를 바꿨다. 스피드 배구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강타’에 방점이 찍혀 있을 것 같지만, 최 감독이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연타’와 ‘리바운드’다. 최 감독은 “배구는 다른 구기종목과 달리 태클, 가로채기가 없다. 파울로 상대 공격을 끊을 수도 없다. 공격 기회가 더 없이 소중한 종목”이라고 말했다. 블로킹으로 완전히 막혔을 때는 무작정 때려 넘기는 게 아니라 연타로 공격기회를 다시 가져오는 게 필요하다. 이를 다시 받아 올려 공격 기회를 다시 만들어야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최 감독의 포메이션은 공격 뒤 반드시 리바운드에 대한 대비가 포함돼 있다.

‘배구 덕후’ 최 감독이 배구를 파고들자, 선수들이 따라왔다. 복잡하고 어렵지만 해 보면, 신이 나는 배구다. 누군가 한 명을 위해 나머지가 희생하는 배구가 아니라 6명이 함께 하는 배구다. 세터 노재욱은 “배구가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선수들이 하나로 뭉쳤다. 최 감독은 “최근 8연승이 24일 사이에 나왔다. 3일에 1경기 꼴로 힘든 일정이었는데 선수들이 잘 뭉쳐준 덕분”이라며 “특히 주장 문성민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스피드의 추구는 데이터의 필요를 낳았고, 데이터의 축적은 선수들의 신뢰를 만들어냈다. 현대캐피탈의 실험은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 배구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덕후’의 열정이다.

‘배구 덕후’의 ‘덕질’은 계속된다. 구단 관계자는 “너무 배구에만 몰입하셔서 제발 취미를 좀 가지시라 했더니 이런 걸 하고 계시더라”라며 가방에서 학생용 수학 문제집을 슬쩍 꺼내 보였다. 최 감독은 “혹시 수학을 다시 좀 해 두면 데이터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럽고 쑥쓰럽다”고 한사코 촬영은 사양했지만 죄송하다. 쓰지 않을 수 없다. 덕후의 덕질은 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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