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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1위 핵심 전력 양의지, “우리는 지금 그라운드 안쪽만 본다”

2010시즌을 앞두고 경찰팀 군복무를 마쳤다.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지만 팀 3번째 포수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양의지(29)는 “지금은 감독님이신 김태형 코치님이 선발 투수들이 엔트리에 포함되면 빠질 거니까 2군에서 준비 잘 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개막 2차전이었던 3월28일, 두산 선발 이현승은 KIA 타선에게 난타를 당했다. 2사를 잡아 놓고도 연속 타자 홈런을 허용하는 등 5점을 내줬다. 2회초 수비 때, 김경문 감독은 포수를 바꿨다. 2007년 3경기 나와 1타석이 전부였던 양의지의 데뷔 4번째 경기였다. 두산은 그 경기를 10-9로 뒤집었다. 양의지는 그때를 두고 “타자들이 잘 쳐준 덕분에 1군 생명이 하루 연장됐다. 그리고 다음 날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말했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양의지는 30일 목동 넥센전에서 선발 마스크를 썼다. 양의지가 말한 운명의 상대는 넥센 외국인 투수 번사이드. 양의지는 2회 첫 타석에서 번사이드로부터 데뷔 첫 홈런을 때렸다. 6회에는 김상수로부터 홈런 1개를 더 때렸다. 양의지는 그해 두산의 주전 포수가 됐고, 20홈런으로 신인왕에 올랐다. 개막 2차전의 깜짝 교체 투입, 3차전에서 나온 첫 타석 홈런, 포수 왕국 두산에서 1군이 가물가물하던 유망주 포수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야구도, 삶도 구름 사이로 순간 비친 햇살에 얼굴이 달라져 보이는, 운명같은 순간을 만난다. 만약 그 장면이 없었다면, 어쩌면 2015시즌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이어진 프리미어 12 대회 우승도 없었을지 모른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양의지는 2006년 2차 8라운드로 두산에 지명됐다. 그해 드래프트는 류현진, 강정호, 민병헌 등이 줄줄이 지명된 해였다. 양의지보다 지명 순서가 늦은 선수는 겨우 7명, 꼴찌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명순서가 미래의 성적을 결정짓지 않는다. 그해 지명조차 되지 못한 김현수는 지금 볼티모어에서 뛴다. 양의지가보다 지명 순서가 4순위 늦었던 SK 이명기도 지금은 주전이다.

멈춘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는다. 그게 언제인지 알기 어려울 뿐이다. 많은 하위 지명 선수들의 인생 시계 역시 멈춘 것 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양의지의 시계는 경찰팀 복무 때 초침이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승안 감독은 ‘너희들이라고 1군 가서 못할 거 같냐, 1군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의지는 “그때 많은 것이 바뀌었다. 멘탈이 강해졌다”고 했다. 양의지는 관물대에 ‘내년에는 1군에서 야구하자’고 적어 붙였다. 목표는 현실이 됐다. 난타와 역전, 행운이 따른 홈런 덕분이었지만 관물대에 적어 둔 목표와 이를 통해 키운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그 기회에 올라타는 것은 물론 그 끄트머리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2010년 이후 6시즌, 양의지는 2번의 골든글러브(2014~2015)를 받는 포수가 됐고, 한국시리즈와 프리미어 12의 우승을 함께 한 포수가 됐다. 우승의 자신감은 양의지를 한 단계 더 성장시켰다.

양의지는 우승 경험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뭔가 느끼는 게 있는데. 예전에는 ‘오늘 경기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운 게 많았는데, 이제 앉아 있으면 자신있는 것 같다. 안 좋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느껴지는 게 있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2014년에는 2군 SK 경기 때 박경완 당시 2군 감독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저 1주일 동안 70점이나 줬어요, 어떻게 하죠”. 박경완은 그때에 대해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고 얘기해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양의지를 리그 최고 수준의 포수로 만든 것은 행운과 시련,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외에도 양의지 특유의 ‘여유’ 덕분이다. 데뷔 초반 설렁설렁 걷는 듯한 팔자걸음과 맥없는 듯한 스윙은 때로 비난의 대상이었다. 투지 부족으로 읽혔다. 양의지는 “어릴 때 그런 모습이 멋져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 이미지가 아직도 있기는 한데, 열심히 안 하는 건 아니니까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며 웃었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그 여유가 큰 경기 승부에서 장점으로 나타난다. 지난해 NC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 양의지는 발가락 엄지 뼈 골절 상태에서도 다시 마스크를 썼다. 팀은 전날 2-16으로 대패했고 1승2패로 몰린 터였다. 4-0으로 앞선 7회말 1사 2루 양의지가 타석에 들어섰다. 파울과 볼이 거듭되는 치열한 수싸움 속 볼카운트 2-2에서 6구째,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진 순간, 타석 앞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양의지는 그 나비를 한 손으로 살살 달래 쥔 뒤 타석에서 물러나 한 켠에 놓아줬다. NC 이태일 대표는 “그 상황에서 대부분 나비를 쫓아 내거나 잡아 죽이거나 했을텐데, 그걸 살살 쥐어서 풀어주더라. 저 상황에서 저런 여유를 갖는 선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양의지는 “왠지 모르겠는데, 그때 나비를 잡아 죽이면 부정탈 것 같기도 하고, 욕 먹을 것 같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의지는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지만 두산은 그 경기를 7-0으로 이겼고 가을야구의 방향이 바뀌었다. 양의지에게는 ‘파브르 선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프리미어12에서도 준결승, 결승에서 마스크를 썼다. 점수를 뺏겨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양의지는 “이대은이 던지는 첫 타순 한 바퀴 때 몸쪽 승부를 한 뒤 그 다음 부터는 바깥쪽으로 볼배합을 가져갔다”고 했다. 양의지의 여유는 마운드의 여유로 이어졌고, 결국 극적인 대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우승팀 두산은 시즌 초반 1위를 질주 중이다. 지난해 후반기부터 어린 투수들을 잘 이끌어 간 포수 양의지의 힘이기도 하다. 양의지는 “혼자 한 것 아니다. (최)재훈이랑 같이 한 거다”라면서 “다만 어린 투수들에게 ‘너 하고 싶은 대로 던져라’라고 한다. 마운드에서 자신없는 모습이 제일 안 좋다. 자신있게, 맞더라도 씩씩하게 이런 얘기 많이 한다”고 했다. 새 외국인 투수 마이클 보우덴과는 서로 배워가는 사이다. 양의지는 “한화전 때다. 김경언 타석 때 바깥쪽으로만 승부하다가 홈런 맞았다. 보우덴이 ‘몸쪽에 한 번 보여주고 가는 게 좋았을 것 같다’고 하더라. 서로 함께 연구하고 배우고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양의지도 우승으로 성장했지만, 두산 전체가 우승과 함께 성장했다. 양의지는 “다들 자신감이 넘친다. 경기 풀어나갈 줄 안다. 도대체 이 팀은 선발들이 모두 6이닝 이상 던져야 하는 걸로 아는 것 같다(웃음). 게다가 (정)재훈형이 중간에서 흐름을 막아 버린다. 내가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다 투수들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양의지는 “벤치도 우리한테 확실히 맡겨준다. 우리가 직접 해 봐야 느끼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다. 재훈형이 중간 투수들한테 경기 처음부터 보고 있으라고 얘기 많이 한다. 경기를 봐야 상대가 어떤지 안다. 첫 타석에 파울 타구 다리 맞은 선수가 있다고 치자. 경기 후반 구원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는데 그 주자가 1루에 있다면 굳이 기를 쓰고 견제구 던질 필요 없다. 경기에 집중하고, 경기를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산 양의지 | 두산 베어스 제공

두산이 올 시즌 강력하게 갖고 있는 수비 시프트 역시 마찬가지다. 내야수 오재원-김재호가 알아서 움직인다.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김태형 감독은 “감독의 감이라는 게 있다. 내가 나가서 바꾸고 싶을 때가 없지 않다. 바꿔서 맞을 때도 있다. 그런데, 감독이 맞으면 더 문제다. 그러면 선수들이 못 움직인다”고 말했다. 두산의 힘은, 지금 모두가 그라운드 안쪽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승팀의 자신감, 우승팀의 여유 덕분이다. 양의지는 포수다. 포수는 모두와 반대 방향으로 앉는다.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는 자리이자, 무척 중요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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