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나는 사회의 주인인가, 노예인가를 묻는 ‘대리사회’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네 번째 책은 <대리사회>(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다.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답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리사회>는 대학에서 8년 동안 국문학 연구자와 시간강사로 지냈던 김민섭이 펴낸 두 번째 책이다. 지난해 화제작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펴낸 이후 그는 대학을 박차고 나와서 대리기사가 된다. 우선 아내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가장으로서 결정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한없이 좁고 불편한 그 공간에서 세상을 응시하며 건져올린 실존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학은 이 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최전선이었으며,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대리인간으로 개조하는 ‘대리 공간’에 불과했고, 이에 따라 자신은 그동안 대리인간으로서 살아왔음을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고백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이렇게 사유한다.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

김민섭은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한다. ‘대리의 시간’을 직접 몸의 언어로 각인해 간 것이다.

<대리사회>를 읽으며 나는 그동안 잊은 줄조차 모르고 살았던, 아주 귀중한 단어를 다시 찾아냈다. ‘주체성!’. 이 흥미진진한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흥미진진함과 별도로, 수많은 질문들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온전한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규정은 누가 하는 것인가?’ ‘나는 이 사회로부터 대체 무엇으로 규정되어 왔는가?’…. 이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드는 책이라니.

주체성은 그림 작업하고도 긴밀한 연결점이 있다. 화가는 점 하나, 물체 하나를 표현해도 그것이 생명처럼 온전히 살아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끝없이 애쓴다. 이것이 그림의 주체성이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

나는 작가의 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대리사회의 노예가 돼야만 최소한의 생존이라도 보장받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나의 그림에 자유와 주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날마다 애써왔다. 그것을 스스로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나는 어떤가? 화가라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는, ‘주체로서 아름답고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막연하고도 관성적인 믿음을 갖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보았다.

천지수 작가의 ‘사유하는 자동차 -20161126’ 65.1x53㎝ Oil on canvas 2016.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화가로서의 나는 과연 독립된 주체였을까?’ 이 책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책을 읽으며, 대리사회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나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자동차라는 물질은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을 위한 도구다. 그 도구, 즉 자동차에 주체성을 부여해 보고 싶었다. 내 그림 속 자동차의 입장을 주체로 일으켜 ‘배려’해 보는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상상이 시작됐다.

자동차는 날고 싶다. 매연 가득한 도로를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이나 손님이 아닌 친구들을 태우고는 멋진 곳을 향해 자유롭게 날고 싶다. 자동차는 사유하는 대로 스스로 형체가 변한다. 차에 깃털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날개가 돋아나고 차의 지붕에서는 나무가 자란다. 가지에는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이 열매처럼 매달려 환하게 나갈 길을 밝힌다. 바퀴는 풍선으로 변한다. 날아다니는 자동차의 바퀴는 이제 더 이상 맹렬하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풍선은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는 열기구가 된다. 사람들은 행복하다. 차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으로 이어져 행복을 만든다.

물건에도 ‘물론’ 마음이 있다고 믿었던, 이 한없이 순수하고 명랑한 토테미즘은 나를 순식간에 아이로 만든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라나는 자유로운 자동차’를 그려놓고 나서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캔버스 앞에 꽂아두었던 붓들이 모두 양초로 변해서 스스로 발화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이 붓을 들 테지만, 나는 이미 어제의 그 화가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불을 손에 든 화가일지도 모른다. 오늘부터는 캔버스를 활활 태워 보려고 한다.

상단으로 이동 스포츠경향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