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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인터뷰] 신태용 “소방수는 내 운명…바르샤 3총사 믿는다”

스포츠에서 ‘소방수’라면 누구를 먼저 떠올릴까. 야구에서 불을 끄는 보직인 마무리 투수들이 거론되기 십상이지만, 축구에선 요즘 한 사람의 별명으로 굳혀졌다. 한국 축구가 절망에 빠질 때면 등장해 희망으로 바꾸는 신태용 감독(4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실패로 끝난 2014년 브라질월드컵 직후 축구대표팀 코치로 부임해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살려냈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선 급성 백혈병으로 쓰러진 고 이광종 감독을 대신해 8강이란 성과를 냈다. 이번에는 검증된 지도자라는 이유로 갑자기 공석이 된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안방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5월20일~6월11일)에 도전한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한국이 국내에서 단독으로 치르는 가장 큰 FIFA 주관 대회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안았다.

U-20 축구대표팀의 신태용감독이 21일 제주 서귀포의 훈련캠프에서 스포츠경향과 2017년 신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귀포|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소방수는 내 운명…“백수도 각오했다”

소방수는 궂은 일을 맡다보니 손해보는 경우가 다반사다. 신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는 U-20 대표팀을 맡으면서 2018년까지 임기가 보장됐던 월드컵대표팀 코치직을 포기했다. U-20 대표팀 감독은 대회를 마치면 일 자리도 끝이다.

신 감독은 백수를 각오한 이유로 ‘소방수 운명론’을 꺼냈다. 새해를 앞둔 지난달 말 제주 서귀포에서 스포츠경향과 만난 그는 “소방수는 못 하면 큰 욕을 먹는 자리니 나도 부담이다. 감독직을 제안한 분들(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에게 ‘왜 또 신태용이냐?’고 물으니 나밖에 없다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국 축구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됐다는 생각에 고민없이 수락했다”고 말했다.

현역 시절 프로 선수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실적(통산 99골·68도움)도 쌓았지만 국가대표로 빛을 보지 못했던 자신이 축구인들로부터 지도자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손해도 감수한 것이다. 신 감독은 “난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학연(영남대)이나 지연(경북 영덕)이 없어 축구로는 변방에 머물던 사람”이라며 “실력 하나로 승부했던 내가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니 백수가 되는 게 두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우보다 나은 세대…바르샤 3총사 있다

소방수가 현장에 출동하면 구조 대상을 살피는 게 우선이다. 줄곧 성인 무대만 맡았던 그의 첫 업무도 20살 어린 선수들의 이름과 얼굴을 읽히는 것이었다. 지난달 서귀포 전지훈련에서 30여명의 선수들을 불러 파악을 마친 신 감독은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생각보다 선수들의 기량이 탄탄했다. 신 감독은 “막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이름을 아는 선수가 별로 없었다”며 “그런데 하루 이틀 훈련을 시켜보니 잘 따라오더라. 차범근 감독님도 우리 아이들과 광운대의 연습경기를 보시더니 ‘애들 참 잘 한다’고 칭찬하셨다”고 웃었다.

신 감독을 더욱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바르셀로나 유소년시스템에서 자라고 있는 3총사들이다. 국내 팬들에도 잘 알려진 백승호(20)와 이승우(19) 장결희(19) 등 세 선수가 이번 U-20 월드컵의 주축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신 감독은 “일단 포르투갈 전지훈련을 통해 바르셀로나 3총사들의 기량과 성향을 파악할 생각”이라며 “그래도 세 선수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유명한 선수가 하나 없어 ‘골짜기 세대’로 불렸던 리우올림픽 선수들의 억울한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걱정이 하나 있다면 이번 세대에 유독 체구가 좋은 골잡이가 없다는 점이다. 신 감독은 “대표팀 후보군에 1m80을 넘는 골잡이가 없다. 내 축구는 앞에서 싸워주고, 뒤에서 공을 예쁘게 만들어가야 한다”며 안타까워 했다. 올림픽과 달리 U-20 월드컵에는 연령에 상관없이 선수를 뽑을 수 있는 와일드카드가 없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신 감독은 “같은 조건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당분간 대학이라도 두루 돌아보며 선수를 찾아보고, 없으면 내 전술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U-20 축구대표팀의 신태용감독이 21일 제주 서귀포의 훈련캠프에서 스포츠경향과 2017년 신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귀포|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소방수의 무기는 신뢰…내 아들은 안 뽑는다

소방수의 무기는 신뢰다. 누구나 공평하게 대할 것이라 믿기에 기다릴 수 있다. 신 감독도 신뢰를 얻으려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다. 축구 선수인 큰 아들 재원군(19·학성고)을 U-20 대표팀에서 제외한 것이다. 아들도 2년 전 칠레에서 열린 17세 이하(U-17) 월드컵 출전을 노린 동량이지만, 첫 만남에서 “백지부터 경쟁이 시작된다”고 약속한 선수들과의 신뢰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신 감독은 “아들이 더 잘되도록 돕는 게 아빠라면, 난 빵점”이라며 “다른 선수들을 더 열심히 뛰게 하려면 내 아들을 뽑을 수 없었다. 아들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아닌 나머지 선수들을 선택했으니 성적을 내야한다. 그는 안방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짧은 준비 기간에도 최소 8강을 다짐하고 있다. 쉬는 날에는 주변의 조언을 구하느라 바쁘다. 1983년 멕시코 대회에서 역대 U-20 월드컵 최고 성적인 4강에 오른 박종환 전 감독과 약속도 잡았다. 현역 시절 스승이기도 했던 박 감독에게 도움을 청한 그는 “어떤 말씀을 주실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내심 스승의 뒤를 이어 34년 만의 4강을 재현할 욕심이다. 믿는 구석도 있다. 이번 대회가 닭띠해인 정유년에 열린다는 것이다. 그는 호적에 1970년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는 1969년생이다. 신 감독은 “1993년 현역 시절 성남에서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최우수선수(MVP)상을 받을 만한 활약을 펼치고도 상은 받지 못했다”며 “올해 상(감독상)을 받지 못해도 좋다. 대신 성적은 최소한 8강, 아니 4강 신화를 재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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