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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아나키스트 폴 시냐크의 ‘부수는 남자’

부수는 남자(Le Demolisseur),폴 시냐크(Paul Signac), 1897년 작, 251×150.5㎝

오늘 소개해 드리는 그림은 폴 시냐크의 작품입니다. 원래 사전적 의미는 ‘철거자’ ‘파괴자’이지만, 뭔가를 ‘부수는 남자’ 라고 여기서는 불러보겠습니다.

“‘부수는 남자’는 1896년부터 사람의 노동을 주제로 장식 미술 성격의 대규모 연작을 기획하던 폴 시냐크의 구상 중 한 부분이다. 이 그림에는 그의 정치적인 신념, 즉 아나키스트로 유명했던 시냐크의 이념이 들어 있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이 강한 곡괭이질로 부수고 있는 것은 구시대의 낡은 체제의 상징이고 이 ‘새로운 건설을 위한 파괴’는 새로운 미래를 가져온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폴 시냐크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으나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아나키스트로도 유명했습니다. 19세기의 수많은 정치 사상은 기득권에 해당하는 왕당파나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해 인권이나 평등을 강조하는 좌파운동이 등장하며 다채로워졌습니다. 아나키즘 운동은 그동안 쌓여 왔던 모든 체제를 혁파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자는 점이 호응을 얻습니다. 이 그림에서 곡괭이는 그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고요.

“멀리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단순히 바탕화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의적이고 예언적이다. 이 철거 노동자들의 배경이 되는 생각은 폴 시냐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벨기에 유명 시인 베르하렌이 발표한 시 <사내들>의 ‘그 사람, 이 일을 해낼 바로 그. 이 낡은 희망과 권력의 쓰레기들을 청소해 낼’이란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었. 폭발하는 힘과 노동자의 고귀한 노동, 그리고 마치 기념비 조각을 보는 듯한 육체와 자세의 표현 등이 그림에서 돋보인다.”

이 그림은 단순히 예술작품으로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법인 점묘 붓 터치로 색깔에 대한 연구와 조화에 대한 것을 목표로 하던 신인상파의 기본적인 아이디어 위에 폴 시냐크는 이 작품이 벽의 한쪽 면을 장식하기를 원했고, 그 자리가 공공장소가 되도록 애썼습니다. 시냐크는 새시대가 왔음을 알리길 원했고, 이 그림이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예언자가 되길 기대했습니다.

“시냐크는 이 그림을 벨기에 건축가 빅토르 호르타가 짓는 민중회관에 기증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현실화되지 못했다. 민중회관을 짓던 호르타는 시냐크의 제안에 전혀 관심이 없어 시냐크에게 상처만 남겼다.”

빅토르 호르타는 당시 벨기에 노동당의 주문을 받아 이제까지 지어 본 적 없는 유리와 강철로 구성된 대형 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르누보 건축가로 알려진 그의 손에서 강철과 유리라는 재료는 당연히 새시대의 상징이 되고 그가 건축을 통해서 보여줄 미래에 대한 개념은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주목하고 있었죠. 여기에 건축의 주문자인 노동당의 색깔까지 더해져 ‘브뤼셀 민중회관’은 변화하는 시대의 깃발이 될 것 같았습니다.

원래 이런 대형 회화를 통해 마치 공공조각처럼 거대한 상징이나 기념이 되길 바란 시냐크가 호르타에게 한 제안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호르타는 시냐크가 아니라 상당히 모호하고 기괴한 작품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크누프에게 작업을 맡겼고, 크누프는 이제까지 자신의 색깔과 다르게 호르타가 원하는 대로 완성해 냅니다. 그렇게 시냐크의 계획은 좌절됐지만 우리는 오늘 오르세 미술관에서 시냐크가 바라보던 새시대의 비전이 무엇인지, 현실화한 적은 없으나 그가 희망과 의욕을 가지고 보여주려 한 미래의 한 조각을 보고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안현배는 누구?

서양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예술사로 전공을 돌린 안현배씨는 파리1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예술품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태어나게 만든 이야기와 그들을 만든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라와 언어의 다양성과 역사의 복잡함 때문에 외면해 오던 그 이야기를 일반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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