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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훈의 창사 메일] 보고싶다, 망연자실한 중국 관중석을

1950년 7월16일. 브라질의 ‘축구 성지’ 마라카냥 스타디움에 17만여 명이 몰렸다. 홈팀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맞붙는 1950년 월드컵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후반 3분 브라질이 선취골을 넣자 브라질 팬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데 브라질은 후반 21분 동점골에 이어 34분 역전골까지 내줬다. 브라질 1-2 역전패. 종료 휘슬이 울리자 브라질 관중은 할 말을 잃었다. 당시 결승골을 넣은 우루과이 대표 알시데스 기지아는 이렇게 말했다.

“마라카냥에 모인 20만 브라질 팬의 입을 다물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프랭크 시나트라(미국 가수), 그리고 나 3명뿐이다.”

우리나라 대표팀도 원정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승리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한·일전일 게다.

2018월드컵 예선 중국전을 앞둔 한국 대표팀의 손흥민이 21일 중국 창사 후난시민운동장에서 훈련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9월28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 한국을 맞은 일본은 복수를 다짐했다. 4년 전 다 잡은 월드컵 티켓을 눈 앞에서 놓친 ‘도하의 비극’ 때문이다. 일본은 와그너 로페즈까지 귀화시켜 한국 타도에 목숨을 걸었고 일본 언론도 최소 두 골 차 승리를 예상했다. 모든 입장권이 매진됐고 경기장은 푸른 셔츠를 입은 5만여 일본 팬들로 물들여졌다.

일본은 후반 22분 선취골을 뽑았고 경기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런데 일본은 후반 38분 동점골을 허용했다. 이기형의 크로스에 이은 최용수의 헤딩패스, 그리고 서정원의 마무리 헤딩슛이었다. 일본은 후반 41분 결정타까지 얻어맞았다. 지금도 눈에 선한 이민성의 통렬한 중거리포. 당시 축구해설가 신문선씨는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본은 1-2로 패했고 그날 비가 많이 내렸다. 할 말을 잃은 일본 팬들 얼굴에 흘러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축구는 중국원정에서도 크게 승리한 적이 있다. 2010년 11월15일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아게임 남자축구 16강전이었다. 관중석에는 6만 관중이 몰렸고 그들은 “중궈, 지아여우(中國, 加油·중국 화이팅)”를 쉼 없이 외쳤다. 그러나 중국은 김정우, 박주영, 조영철에게 연속골을 내주고 0-3으로 완패했다. 6만 관중은 ‘한 골이라도 넣으라’며 “진이거(進一個)”를 목놓아 외쳤지만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3일 오후 8시35분 중국 창사 허룽 스타디움에서 중국과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6차전을 치른다. 중국은 지난해 세계적인 명장 마르셀로 리피를 연봉 300억원에 사령탑으로 모셨다. 또 한국을 잡겠다며 경기 장소도 쿤밍에서 ‘행운의 땅’ 창사로 옮겼다. 허룽 스타디움은 한국 응원단 250석 정도를 빼고 전부 중국 팬들이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에게 엄청난 야유를 퍼부을 게 뻔하다. 그러나 한국대표팀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기성용(스완지시티), 김신욱(전북 현대), 구자철·지동원(이상 아우크스부르크) 모두 “우리만 신중하게 준비를 잘 하면 이길 수 있다”며 “상대가 누구든, 여기가 어디든, 감독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은 아시아 최강이다. 손흥민(토트넘)만 경고누적으로 뛰지 못할 뿐 지금 대표팀에는 기량이 아주 좋은 선수들이 많다. 중국이 창사에서 기록 중인 최근 A매치 8경기 무패행진(4승4무)도 언젠가 깨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걸 지금 우리나라가 해내지 못하리라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 한 개도 떠오르지 않는다. 중국 팬들이 얼마나 몰리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창사는 중국 홈이다. 한국에게 야유를 퍼붓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은 그냥 귀를 닫고 우리 플레이만 하면 된다. 중국 팬들이 쏟아내는 소음 때문에 서로 소통하기 힘든 것은 우리나 중국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수많은 중국 관중이 아무리 악을 쓰고 저주를 퍼부어도 그라운드에서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사람은 22명뿐이다. 구름 관중 중 어느 누구도 공을 만질 수 없고, 휘슬을 불 수 없으며, 한국 선수들의 몸을 건드릴 수도 없다. 이제 남은 건 태극전사 11명이 수많은 중국팬들이 들어찬 경기장에 시원한 골로 찬물을 확 끼얹는 일뿐이다. 그리고 그 때 손가락을 입에 대는 ‘쉿’ 세리머니를 폼나게 하면서 죽음과 같이 흐를 적막감과 고요함을 즐기면 된다.

한국전 필승을 꿈꾸며 중국 대표선수들은 일주일 동안 허롱 스타디움 보조 구장에서 훈련을 해왔다. 중국은 사방에 약 5m 높이의 장막을 치고 비공개 훈련을 해왔다. 그곳에는 이런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중압지하무구색(重壓之下無懼色). 극도의 압박감 속에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물론 중국이 그만큼 한국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축구대표팀이 훈련해온 창사 허룽 스타디움 보조구장. 골대 뒷편 붉은 색 장막에 ‘중압지하무구색’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문구가 눈에 띈다. 김세훈 기자

한국 대표팀이여, 중국 관중 앞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강하다는 걸, 한국이 아시아 최강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자. 그리고 패한 뒤 망연자실한 채 할 말을 잃은 중국 관중에게 ‘살인 미소’ 한 번 날려주고 폼나게 집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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