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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프리즌’ 한석규는 맹수다

배우 한석규는 맹수다. 점잖은 이미지 속에 상대의 허를 찌르는 ‘한방’이 있다. 매번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하룻강아지’와는 다르다. 여유롭고 인자하게 대하다가도 할퀼 땐 제대로 흔적을 낸다. 배우로서 연기력도, 인간으로서 화법도 한결 같다. ‘고수’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한석규는 십수 명의 취재진 속에서도 자신만의 아우라를 잃지 않았다. 인터뷰 초반 “질문 안 받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 할 거예요”라는 농을 툭 던지는가 하면,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며 인터뷰를 좌지우지했다. 연기 경력 30년의 내공을 누가 이기랴.

배우 한석규가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쇼박스

당황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때론 장황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에 정신을 놓치기도 했다. ‘맹수’ 한석규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예리하게 콕 집어 전달했다. 예를 들면 이와 같다. 질문은 ‘신인 감독과 작업을 왜 선호하느냐’였다.

“전 TV 출신입니다. 성우도 했고, 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영화를 찍을까. 제가 자라면서 여러 편의 영화를 보지 않았겠어요? 특히 1970년대나 80년대 한국영화는 검열이 심해서 괜찮은 작품이 거의 없었죠. 뭐, 물론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1983년)>처럼 풍자가 강한 영화도 있었습니다만, 관객들은 그걸 보면서 ‘대체 뭔 얘기를 하려는 거야’라는 걸 정확히는 알지 못했어요. 검열이 심하니까 ‘나쁘다, 좋다’를 직설적으로 말할 수가 없잖아요? 고작 한다는 게 청와대 앞에서 광대처럼 춤 추는 풍자 정도지. 이건 가짜예요. 우리(배우 혹은 예술인)가 진짜를 어떻게 말해? 그런데 이게 우리가 하는 일인 것 같아요.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푹’ 쑤시는 거지. 그렇다면 영화 <프리즌>의 나현 감독은 왜 교도소 속 폭력과 권력을 다뤘을까. 그것도 가짜 얘기잖아요.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을 ‘교도소’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가.”

느릿느릿한 말투까지 더해지니 10분은 족히 잡아먹었다. ‘조급증’을 앓는 기자 하나가 “그래서 왜 신인 감독과 함께 하느냐”고 재차 물어보니, 한석규 눈빛이 변했다. 팔짱을 낀 채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안주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 뒤 ‘씨익’ 웃었다. ‘당신이 원한 대답이 이 뻔한 거 아니냐’는 뉘앙스가 말줄임표로 다가왔다. “저도 이런 건 안 써요”라고 기자가 대답하니, 그는 그제야 자신의 얘기로 돌아갔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도 주위를 압도한 셈이다.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신인 감독들과 작업했던 것 같아요.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처럼! 이건 영화인들만 ‘으쌰으쌰’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 기존 영화들을 지긋지긋하게 느끼는 젊은 기운들이 더해져야 완성되죠. ‘가짜 같은 얘기는 집어치워’라는 목소리가 커지면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도 바뀌고, 영화 주제도 바뀌잖아요. 영화는 그런 ‘새로운 느낌’이 있어야 오랫동안 남겨져요. 지금은 노쇠하고 병들어 있으니 도약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영화 ‘프리즌’ 한 장면, 사진 쇼박스

<프리즌>을 찍은 이유도 물었다.

“제가 왕 역을 많이 했어요. 어느 날 SBS <뿌리 깊은 나무> 김영현 작가에 <군주론>이란 책을 선물 받았는데 섬찟한 책이더라고요. 왕에게 ‘우매한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이렇게 하라’는 얘기를 쓴 거니까요. 통치자 외에는 보면 안 되는 금서죠. 뭐, 물론 몰래 읽는 이들도 있었겠죠. ‘나도 이 책에서 느낀 걸 <프리즌>으로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프리즌> 소제목이 <영원한 제국>인 것처럼, ‘그래 영원한 제국을 한 번 이뤄보자’라고. 영화의 주제를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익호’란 인물로 그걸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많이 상상했죠. 눈깔 빠진 하이에나, 게다가 입 한 쪽이 뜯겨 너덜거리는 천덕꾸러기 수놈! 그 이미지를 갖고 연기했어요.”

한석규의 화법은 배우로서 롱런한 비결을 짐작케 한다. 장황한 얘기에 방심하면 ‘훅’ 들어오는 송곳 같은 메시지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상대를 무력하게 하는 무서운 무기다.

한편으론 그의 매력이다. 얘길 듣고 있으면 엄청난 물이 돌고 돌아 수채 구멍으로 쏙 빠져나가는 명쾌한 기분이 든달까. 연륜의 힘을 여실히 느낀 60분이었다.

한석규가 출연한 <프리즌>은 감옥에서 세상을 굴리는 놈들, 그들의 절대 제왕과 새로 수감된 전직 꼴통 경찰의 범죄 액션 영화다. 24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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