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톡카톡 시즌2’의 히로인 홍선애. 그녀의 직업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다. 경제와 건강, 그리고 교양 분야가 그녀의 전문영역이다. 방송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카메라 앵글 밖에서의 홍선애는 어처구니없을 만큼의 고지식함과 독서에 관한 한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가진, 조금 엉뚱한 청춘이기도 하다. 톡방의 주인장 김성신의 직업은 출판평론가다.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책의 흥미로움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그는 늘 재미를 찾는다. 책에 관한 격 없는 수다를 서평으로 기록해 보자는 ‘북톡카톡’ 칼럼도 그의 아이디어다. 책읽기가 연애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아가씨 홍선애. 꽃중년을 자처하는 수다쟁이 아저씨 김성신. 두 사람의 즐거운 책 수다 북톡카톡 여든 번째 이야기는 김규회의 <우리가 사랑한 한국 소설의 첫 문장>(끌리는책)이다.
성신:“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선애: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 아닌가요? 느닷없이 왜?
성신:이 문장이 왜 그토록 인상적인지를 한번 생각해 봤어.
선애:‘소설 역사상 최고의 첫 문장’이라고도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희한하긴 해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설국>의 첫 문장을 인상적이라고 할까요?
성신: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해 인상적이라고 느낀다면, 거기엔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리 느낀다면 말이야.
선애:정말 그 이유가 궁금해요. <설국>의 첫 문장은 왜 인상적일까요?
성신: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우선 이 문장에 주어가 없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라고 봐.
선애:그게 무슨 뜻이에요?
성신:주어가 없는 저 문장은 마치 나의 독백처럼 읽혀지지 않아? 주어도 없고, 게다가 어떤 대상을 놓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선애:아! 정말 그러네요. 그래서요?
성신:그래서 저 문장을 읽자마자 독자는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직접 경험한 어떤 장면을 떠올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지. 한마디로 말해서 ‘훅 들어가는 거’야. 첫 문장을 읽자마자 소설의 공간 속으로.
선애:와~ 정말 재미있네요. 그러고 보니 <설국>은 줄거리도 별로 없잖아요. 중요하지도 않고. 대신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죠. 작가가 대단히 정교한 설정을 숨겨 놓은 것이네요.
성신:그렇다고 볼 수 있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처럼 기억하게 되니까, 저 첫 문장만 다시 봐도 우리는 <설국>을 읽었을 당시에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거지.
선애: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이해가 가네요.
성신: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가 이어져 서사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소설. <설국>은 소설문학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작품이랄까, 바로 그런 의미가 있지.
선애:선생님이 최근 무슨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는지 짐작이 가요.ㅋㅋㅋ
성신:내가 금방 들킬 줄 알았다! ^^
선애:<우리가 사랑한 한국 소설의 첫 문장>이죠?
성신:아예 돗자리 깔아!
선애:‘첫 문장’이라고 하실 때 금방 알았어요. 책의 기획과 구성이 독특해 저도 얼른 찾아 읽었거든요.
성신:누군가 반드시 이런 책을 쓸 줄은 알았는데, 보니까 이런 책을 쓰기에 가장 마땅한 사람이 썼더군. 이런 책의 구성은 얼핏 쉬워 보이지만, 저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거든. 쉽게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완성도를 만들기는 정말 어렵지.
선애:저자는 저널리스트인데, 신문사 편집국 조사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더라고요. 그런 조사 전문가라서 이런 책의 집필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성신: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튼 이런 책을 이런 수준으로 쓰려면, 우선 좋은 작품과 문장을 선별하는 눈이 있어야 하고, 이를 분류하고 편집하는 집요한 노력도 있어야 되겠지. 한번 생각해 봐. 언급되는 그 많은 작품들을 모두 읽고 해석하는 일부터가 보통 일이겠어? 이런 책은 읽기는 쉽지만 쓰기는 정말 어려워.
선애:그러네요. 아무튼 이 책은 명언집보다 훨씬 더 많이 밑줄을 치게 하더라고요. 외우고 싶은 문장도 많았고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명문장도 많았죠.
성신:어떤 문장이 인상 깊었어?
선애:‘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김애란의 <칼자국>에 나오는 첫 문장인데요. 김애란 작가를 다시 보게 됐죠.
성신:어떻게 다시 봐? 평소 김애란 작가를 우습게 봤었나? ㅋㅋㅋ
선애:아니요. 무슨 말씀을!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죠. 그런데 독특하고 새로운 문학적 감각을 가진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라고 생각해 왔는데, 굉장히 정교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을 구사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성신:피카소의 그림을 그의 것인지 모르고 보다가, 갑자기 “이 작품이 피카소가 그린 거예요”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 ㅋㅋㅋㅋ
선애:하하하 비슷해요! 느닷없이 가치를 알게 돼 약간 멍해지는 느낌? 아무튼 첫 문장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한 작가를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만들더라고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성신:선애가 이 책의 기획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했네. ‘첫 문장 다시 읽기’라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기획이지만, 이 기획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굉장히 커. 문학에 대한 이해를 크게 확장시켜 주지. 그것도 아주 순식간에 말이야.
선애:맞아요. 소설을 그냥 ‘재미있는 스토리’ 정도로 여기기 쉽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소설문학이 얼마나 위대한 예술적 영역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죠.
성신:‘좋은 책’의 기준 중에는 바로 그런 것이 있지! 바로 ‘환기’야! 관습화된 독자들의 생각을 순간적으로 확 바꿔주는 능력 말이지. <우리가 사랑한 한국 소설의 첫 문장> 이 책은 바로 그런 좋은 책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선애:사람도 그런 사람은 멋있죠! 요즘 청와대에서 ‘얼굴 농단’ 벌이시는 분들처럼!
성신:아! 이젠 선애까지! 요즘 나처럼 인물민주화 남성들은 아주 수난이다. ㅋㅋㅋ
선애:요즘 정말이지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실감나요.
성신:안구복지국가는 벌써 이룬 거야?
선애:매일 매일이 천국 같아요. 으하하~
성신:이런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