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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국스포츠 희망을 찾아서 ⑨] 위험하고 밋밋한 공터? 그런데 동심이 춤춘다(순천 기적의 놀이터 탐방)

기적의 놀이터 2호가 지난 5월2일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대지구에 문을 열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놀이터 복판에 세워진 스페이스 네트에 올라가 즐겁게 놀고 있다. 편해문 놀이터 디자이너 제공

큰 미끄럼틀 정도를 빼놓고는 변변한 놀이기구가 없다. 햇볕을 피하기 위한 그늘막도 없다. 아이들 보호를 위한 튼튼한 담벼락도, 푹신하게 보이는 우레탄 바닥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깊고 넓은 모래밭, 작은 언덕들, 조그만 도랑, 잠시 쉴 수 있는 틈새 공간이 놀이터를 채우고 있는 전부다. 심지어 아이들 이동로 한 복판을 큰 바위와 통나무가 가로 막았다. 어른들의 눈에는 “위험하면서도 밋밋하기 짝이 없는 이상한 공터”라고 할 법한 곳. 그곳에 아이들, 심지어 어른들이 차고 넘쳤다. 전남 순천에 만들어진 ‘기적의 놀이터’는 동심의 공간이었다.

기적의 놀이터는 지난해 5월 만들어졌다. 전문가가 기획하고 주민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계획을 수정하고 공사를 마치는데 3년이 걸렸다. 이곳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언덕에 조성됐다. ‘엉뚱발뚱’이라는 이름처럼 엉성해 보였다. 그런데 강한 뙤약볕 속에 아이들과 엄마들 50명이 놀고 있었다. 비지땀 속에도 표정은 밝았고 재잘거리는 소리도 명랑했다.

길이 22m 짜리 미끄럼틀이 사실상 유일한 놀이기구다. 원래는 비탈길 속에 완전히 묻혔던 미끄럼틀이 지금은 절반 안팎이 드러났다. 이곳을 만든 놀이터 디자이너 편해문씨는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언덕 이곳저곳으로 올라 다니면서 잔디와 흙이 벗겨졌다”며 “흙빛을 드러낸 언덕은 아이들이 재밌게 논 예쁜 흔적”이라고 말했다. 일반 미끄럼틀은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정해진 지시형 놀이기구. 게다가 법규상 높이도 3m이하여야 한다. 편씨는 “이곳 미끄럼틀은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다양해 질리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때로는 포대를 타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이 지난 1일 전남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 1호에 설치된 미끄럼틀을 타고 놀고 있다. 김세훈 기자

모래밭은 수 십명이 함께 놀 수 있을 만큼 넓다. 흥미로운 건 모래 종류와 깊이였다. 이곳 모래는 강원 주문진에서 가져온 것으로 균질하고 깨끗한 여과사다. 모래밭 깊이는 1m20로 일반 놀이터보다 4배 안팎 깊다. 편씨는 “아이들은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며 “이곳에서는 모래를 파다가 더 내려갈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바닥과 마주칠 일은 없다”고 말했다. 모래밭 옆에는 도랑이 마련됐고 도랑 위쪽에는 재래식 펌프가 있다. 물놀이를 하려면 어린이들이 직접 펌프질해서 아래쪽 도랑에 물을 채워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딸 문가인양을 데리고 온 엄마 곽세경씨(40)는 “딸이 체력이 약했는데 이곳에서 놀면서 너무 건강해졌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며 “평일 매일 4시간씩 논다”고 말했다. 문양은 “숨을 데도 많고 목이 마르면 물도 마실 수 있다”며 “엄마가 그만 놀고 집에 가자고 하면 울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이곳에서 놀이터 활동가로 근무해온 김선미씨는 “지금은 하루 평균 500명이 온다”며 “집에 가자는 엄마, 가기 싫다는 아이가 싸우는 걸 자주 본다”며 웃었다. 놀이터 한켠에는 엄마들의 공간도 마련됐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면서 엄마들끼리 대화할 수 있는 곳이다. 오후가 되면 아파트 건물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늘이 드리워진다. 엄마 조정자씨(40)는 “딸 (황)서연이가 이곳에 못 오면 엉엉 운다”며 “급한 일이 생기면 마음 놓고 딸을 다른 엄마에게 잠시 맡길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요즘 키즈카페 1시간 이용료는 1만원 정도다. 편씨는 “이곳에 지난 1년 동안 연인원 10만명이 와 평균 3시간씩 놀았다”며 “5억원짜리 놀이터가 1년 만에 30억원어치 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지난달 문을 연 기적의 놀이터 2호에서 어린이들이 모래놀이와 물놀이를 하고 있다. 오른쪽 미끄럼틀은 3명이 동시에 탈 수 있도록 폭이 넓게 제작됐다. 김세훈 기자

기적의 놀이터 2호가 지난달 해룡면 신대지구에 개장했다. 이곳은 현대적 느낌이 물씬 나는 아파트 단지 안에 마련됐다. 1호보다는 약간 큰 1500평 크기다. 찻길 바로 옆에 자리했지만 담은 쌓지 않았다. 대신 작은 나무들이 심어졌고 언덕이 쌓아졌다. 언덕에 오르면 모든 게 한눈에 보였다. 놀이터 내부와 외부, 어린이와 어른의 소통을 의미하는 언덕이다.

2호도 1호처럼 모래밭, 미끄럼틀, 도랑이 주를 이뤘다. 가장 눈에 띈 것은 거미줄처럼 줄이 얽혀있는 높이 12m짜리 스페이스 네트(나무 모양 그물)다. 스페이스 네트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기구다. 편씨는 “처음에 겁낸 아이들이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도전하게 된다”며 “아래에서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설계돼 추락위험이 없다”고 말했다. 바로 옆에는 작은 스페이스 네트도 있다. 더 작은 아이들이 오르면서 바로 옆 큰 스페이스 네트를 향해 도전하고 싶은 꿈을 키우게 만든 시설이다.

기적의 놀이터 1호에 마련된 엄마들의 휴식 공간이다. 바로 앞에 재래식 펌프는 아래쪽 도랑에 물을 채우기 위해 설치됐다. 김세훈 기자

이동로 한복판에는 큰 바위, 큼지막한 통나무가 놓였다. 어른들 눈에는 당장 치워야하는 장애물처럼 보였다. 편씨는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피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지 않나”며 “소위 ‘안전한 위험’은 놀이터에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 조희수씨(39)는 “여기에는 친구, 오빠, 동생들이 많아 아이들이 관계 속에서 재미나게 놀고 있다”며 “나도 동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세 아이의 엄마 김수하씨(41)는 “단순한 곳인데 아이들의 놀이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며 “위험한 것을 조심하면서도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편해문 놀이터 디자이너가 기적의 놀이터 1호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김세훈 기자

이곳 놀이터 활동가 문형숙씨는 “아이들이 몰리면서 엄마, 아빠도 함께 오고 있다”며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친구를 만들어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평소 하루 500명, 주말 하루 700명이 몰린다. 이천식 순천시 공원녹지사업소장은 “인근 도시 유치원이 어린이들을 버스에 태우고 단체로 놀러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앞으로 순천에 이런 기적의 놀이터를 10곳까지 조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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