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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민용 기자의 말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6·25전쟁이 만든 우리나라 땅 이름

6·25전쟁이 만든 우리나라 땅 이름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결과는 단순합니다. ‘상대의 영토를 내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그런 위협으로부터 내 영토를 지키느냐’이지요. 따라서 전쟁은 땅 이름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며, 6·25전쟁을 겪은 우리나라 땅 이름 중에도 전쟁의 상처 혹은 역사가 깃든 것이 적지 않습니다. ‘판문점’도 그중 하나이지요.

경기도 진서면 널문리의 휴전회담장. 스포츠경향 DB

현재 판문점이 들어서 있는 곳에는 6·25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널문리’라는 이름의 동네가 자리해 있었습니다. 8·15광복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였지요.

‘널문리’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을 가던 선조 임금과 관련이 있던 곳인데요. 당시 북상하는 왜군에 쫓겨 몽진(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급박한 상황에서 평상시와 같이 길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 거둥하지 못하고 급히 피란함을 비유하는 말)에 나선 선조 임금이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강가에는 강을 건너갈 배가 없었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자신들의 집 널빤지 대문을 뜯어 나와 임금이 무사히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지요.

이런 널문리에서 6·25전쟁 휴전협정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한자를 쓰는 중공군이 순우리말 ‘널문리’를 이해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중공군 측에 “널빤지 문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널문리’를 한자말 판문점(板門店)으로 알려주게 됐고, 이후 줄곤 판문점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용호리 일대에 자리한 ‘파로호’도 6·25전쟁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1943년 일제강점기 때 화천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만들어진 이 인공호수의 원래 이름은 화천호였습니다. 지역의 이름을 딴 자연스러운 작명이지요.

그러던 것이 6·25전쟁 이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라는 현판을 내리면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깨트릴 파(破) 오랑캐 로(虜) 큰 못 호(湖)의 한자말은 말 그대로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를 뜻하지요.

1951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이 일대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데요. 근 3만 명의 중공군을 수장시키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합니다. 정말 눈부신 전공이지요. 이름이 그렇게 바뀔 만합니다.

파로호 인근, 즉 화천군과 철원군 그리고 포천시 사이에 광덕산이 있는데요. 이곳에는 ‘카라멜 고개’라는 재미난 이름의 고개가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 주둔하던 한 사단장이 작전수행을 위해 이 고개를 넘을 때 운전병이 졸지 않도록 모퉁이를 돌 때마다 카라멜을 주도록 지시한 이후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참혹한 전쟁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왠지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물엿, 설탕, 우유, 초콜릿 등에 바닐라 따위의 향료를 넣고 고아서 굳힌 사탕”을 의미하는 ‘Caramel’의 바른 외래어 표기는 ‘카라멜’이 아니라 ‘캐러멜’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캐러멜 고개’로 표기한 글도 많이 보입니다.

또 6·25전쟁의 격전지 중 ‘철의삼각지’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북위 38도 북쪽 중부에 있는 김화·철원·평강을 연결하는 삼각지대로, 군사 요지여서 6·25전쟁 때 크고 작은 전투가 숱하게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유명한 격전지인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철의삼각지’가 표제어로 등재된 사실이 간접 증명합니다.

그런데 이 3곳 중 ‘김화’를 ‘금화’로 잘못 쓰고, 이에 따라 ‘김화 전투’를 ‘금화 전투’로 잘못 쓰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이는 ‘김화(金化)’의 ‘金’이 ‘금’으로도 읽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은 이곳의 땅 이름을 ‘김화’로 밝히면서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읍. 6·25전쟁 후 남북한으로 갈라져, 남한 지역의 대부분은 철원군에 편입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과 관련한 전투를 ‘금화’로 적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한편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는 분지 지대가 있습니다. 해안면에 있으니 이곳의 정식 명칭은 당연히 ‘해안분지(亥安盆地)’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해안분지’라는 이름보다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요. 이곳 역시 6·25전쟁의 격전지 중 하나인데요. 당시 전장의 소식을 전하던 외국의 종군기자가 가칠봉에 올라 이곳을 내려다보며 그 모습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고 해서 ‘펀치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후 ‘펀치볼’은 6·25전쟁의 아픔을 전하는 땅 이름으로 굳어져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현리·오유리를 품고 있는 이곳의 정식 명칭으로는 ‘펀치볼’이 쓰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땅 이름에 영어를 쓰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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