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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최하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만화주인공 하니처럼…

“그래도 또 도전해야죠!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까….”

스포츠 경기에서 패한 후 많은 선수들이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KO패를 당한 뒤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담담하게 내뱉는 이 선수의 말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머지않아 청각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격투기 파이터…, ‘달려라 하나’ 최하나(20·군산엑스짐)다.

최하나 선수(20·군산엑스짐)가 24일 전북 익산 원광대문화체육관에서 열린 ‘맥스FC 09 - 원 모어 라운드’ -52kg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경기장에 들어서고 있다. /이충진 기자 hot@khan.kr

24일 오후 전라북도 익산 원광대학교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입식격투기 대회 ‘맥스FC 09 - 원 모어 라운드’ -52kg 경기에서 최하나는 상대 박성희(21·목포스타)에게 강한 하이킥을 맞고 쓰러졌다.

2라운드 KO패.

링 바닥에 누워 높디 높은 경기장 천장을 응시하는 그를 지켜보는 3000여 관중의 입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쏟아졌다.

하지만 단 한명. 최하나의 코치로 나선 신영만 군산엑스짐 관장의 입은 이 소란스러운 순간에도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안타까움이 가득히 묻어나는 눈빛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최하나 (오른쪽) /맥스FC 제공

앞서 경기 중에도 신 관장의 ‘과묵함’은 마찬가지. 선수의 뒤에서 큰 소리로 작전을 지시하는 다른 코치들과는 달리 신 관장은 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다만 큰 동작으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표현했다. 두 사람만의 소통 방식이다.

최하나는 후천성 청각 장애로 인해 왼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오른쪽 귀 또한 청각신경이 서서히 퇴화되고 있어 현재는 중저음만 겨우 들을 수 있다. 이런 최하나에게 큰 목소리로 하는 작전지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심판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상황이 있었는데 잘 들리지 않아 계속 고개만 끄덕였어요. 라운드 중간 휴식시간에 코치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경고를 받았다고요. ‘심판 선생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셨을까’하는 마음에 너무 죄송해요.”

파이터인 그에게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은 격투기 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다. 스스로 약점을 알리기 싫었고, 무엇보다 나중에 돈을 벌어 치료하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도 믿었기 때문이다.

최하나 선수(20·군산엑스짐)가 ‘맥스FC 09 - 원 모어 라운드’를 하루 앞둔 23일 오후 전북 익산 궁웨딩에서 열린 공식 계체량을 통과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충진 기자 hot@khan.kr

하지만 얼마전 그는 동네 병원의 추천을 받아 찾은 대학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몰랐던 새 복합성 난청이 더 있다는 것. 의사는 신경세포가 많이 손상돼 청각을 회복할 확률이 크지 않다고 했다.

여기에 최하나는 선천적인 폐 질환까지 갖고 있다. 격투기 선수로서는 정말 좋지 않은 조건을 겹으로 갖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주변에서 ‘격투기를 이제 그만두라’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회복은 커녕 청력을 잃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최하나는 그럴 마음이 없다. ‘할 수 있을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스스로에게 붙인 링네임, ‘달려라 하나’에는 만화 속 주인공 ‘하니’처럼 힘들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달려 이겨나가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담겨있다.

“주어진 환경이 힘들다고 해서 뒷걸음치거나 주저앉을 생각은 없다. 무모할 만큼 덤벼들고, 무서울 만큼 집중하는 그런 파이터가 되겠다.” 경기에 앞서 열린 공식계체량에서 밝힌 최하나의 각오다.

경기장을 나서는 신영만 코치와 최하나 선수. 두 사람은 아쉬운 KO패 뒤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내일,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충진 기자 hot@khan.kr

이런 열정 때문일까. 이날 경기에서 승리한 박성희는 한 살 어린 최하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선수로서 아주 작은 부상에도 몹시 힘들어 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최하나 선수는 잠깐의 부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도 꾸준히, 또 무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죠. 경기가 끝나고는 ‘이제,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라고 물었던 ‘내 동생’ 최하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한 농산물 유통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며 주말에는 부모님의 농삿일을 돕는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이지만 한 가지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다름아닌 격투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작을 수도 있는 이 꿈을 위해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언젠가는 이 일을 하지 못 하게 될 수 있다는 것, 알고 있어요. 하지만 꿈이 있는 만큼 노력을 멈추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웃음)”

■최하나의 스승, 신영만 관장의 꿈

신영만 군산엑스짐 관장(사진)에게 최하나는 최고의 선수이자 동료 코치다.

자그맣던 여중생 시절부터 그를 가르쳐 온 신 관장은 최하나의 가장 큰 장점으로 ‘집중력’을 꼽는다. 운동하는 그 순간에는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목표한 바를 무조건 이루고야 만다는 것…. 그래서 신관장의 마음은 더욱 아프다.

“처음엔 어떤 문제가 있는 지 몰랐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씩 알게 됐죠. 그 때부터는 아프지 않게 해 주기 위해 운동을 가르쳤어요.”

고교 졸업 후 취업자리를 구하지 못한 최하나에게 그는 체육관 안에서 코치를 맡아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조건은 ‘좋은 직장을 얻을 때까지만’. 누구보다 최하나의 형편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최하나의 꿈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신 관장은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더 크게, 누구나 볼 수 있게 기사를 써 달라고 했다. 그는 제자를 더 큰 병원에 데려가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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