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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시대를 떠나서도 공감하는 울림 ‘수확하는 사람들의 품삯’

수확하는 사람들의 품삯, 레옹 레르미트, 1882년 작품, 215×272㎝

그림은 오랫동안 주문자에 의해 그 주제와 내용이 좌우됐습니다. 그리고 주문자들의 요구는 시대의 유행을 좇기 마련이었습니다. “살롱에 가면 사람들이 항상 ‘이번에도 비너스뿐이군’이라고 했다”는 도미에의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카데믹한 한계에 머물던 예술은 모더니즘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개별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오늘 소개해 드리는 그림은 그러한 개별성의 연장에 있는 작품입니다.

레옹 레르미트라는 화가의 이 그림은 오르세 벽에 걸려 있는 그 자체로 눈에 확 들어옵니다. 수확할 자기 땅이 없는 농부들이 일당을 받는 모습. 농촌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암울함, 피로, 고단함 같은 것에 쉽게 공감할 듯합니다. 그 부분이 레르미트의 강점이지요.

“파리 북부 피카르디의 농촌 출신인 레르미트는 오로지 자신의 재능으로 직업적 성공뿐 아니라 신분 상승을 이뤄낸 대표적 작가다. 그의 매력은 그가 떠나온 고향 농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또는 마음에 와닿게 그려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표정은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 이 <수확하는 사람들의 품삯>을 그리려는 레르미트에게 그의 고향 사람들은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1882년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으며 입상한 뒤에 국가가 구입해 룩셈부르크 뮤지엄에 전시한 이 그림의 인기는 꾸준했다. 밀레의 <만종>이 그랬듯이 이 그림도 똑같은 방식으로 카피돼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레르미트가 밀레 이후에 중요한 농민 작가로 여겨지게 됐다.”

신화와 전설만을 좇던 세태를 비난하면서 프랑스 사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쿠르베는 그림을 그릴 때 모델로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써서 현장감을 살리곤 했습니다. 레르미트 역시 시골에서 정말로 소작하는 사람들을 모델로 세웁니다. 혁명을 겪고, 노동자들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고, 공화국 체계가 되면서 정치적으로도 국민의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습니다. 농민의 그림을 국가가 매입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죠.

“레르미트는 원래 다른 작업에 힘을 쓰다가 친구 바스티앙 르파주가 농부들의 삶을 그린 작품을 보고 자신도 이 주제를 다뤄 보기로 마음먹었다. 르파주나 밀레의 농민화에 비해서 구성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편이다. 장면의 구성은 역사화를 보는 것 같다. 첫 줄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즉 큰 낫을 들고 사진처럼 그려진 나이든 사람과 그 곁에서 젖을 물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들의 뒷줄에는 일상의 무게감과 고된 삶을 상징하는 듯 자신들의 품삯을 기다리는 농부들이 그려져 있다. 바로 이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예술은 늘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이 비교적 성공을 거둔 것은 19세기 후반 농민들의 삶에 신경을 쓰던 정부의 지원책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정치적 분위기와 일반인들의 애정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실한 작업에 대한 적합한 상이었지만, 레르미트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오르세가 설명하듯 그는 운이 좋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그림 앞에 서 있으면, 큰 낫을 어깨에 걸치고 앉아 있는 늙은 농부의 눈빛에 담긴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레르미트의 주인공들은 분명히 시대와 나라가 다른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울림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이라기보다 ‘그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림의 어느 부분 하나도 허술하게 그리지 않아 화가의 꼼꼼한 성격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농부의 눈 속에 비치는 ‘삶’을 우리에게 공감케 해주는 화가.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릅니다.

미술사학자 안현배는 누구?

서양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예술사로 전공을 돌린 안현배씨는 파리1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예술품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태어나게 만든 이야기와 그들을 만든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라와 언어의 다양성과 역사의 복잡함 때문에 외면해 오던 그 이야기를 일반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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