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찢’이라는 말이 있다. 만화를 막 찢고 현실 세계로 나온 듯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만찢녀’나 ‘만찢남’ 등으로 쓰인다. ‘만찢’의 백미는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장인물과 똑같은 의상과 외모로 분장하고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동인 문화인 ‘코스프레’(Costume Play)일 것이다.
폭염과 장맛비가 번갈아 전국 곳곳을 강타하는 7월이었지만, 코스플레이어들의 열정과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지차체와 코믹스 회사 등이 주최하는 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곧곧에서 열린 가운데, 코스플레이어들도 저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현실 세계에 재현하고 모여들어 마음껏 매력을 뽐내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동인 문화’라는 말이 내포하듯 ‘비슷한 취미와 성향을 지닌 사람끼리 즐기는 축제’에서, 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가족 단위 나들이객은 물론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시회이제 축제의 장으로 진화 중이다.
주말과 휴일에 만화 축제를 찾은 많은 어린이와 방문객들은 코스플레이어들과 대화하고, 기념사진을 함께 찍으며 ‘캐릭터 문화’를 공유했다. 코스플레이어들이 ‘오다쿠’라 불리는 등 현실 세계와 유리된 취미라는 고정관념을 받은 것은 이미 옛이야기다. 이들은 이제 만화와 애니에서 파생되어 ‘직접 즐기고 함께 나누는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 도우미’ 역할도 하고 있다.
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현장마다 7월의 주말을 화려하게 수놓은 코스플레이어들을 만나봤다.
■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폭염이 전국을 강타한 가운데, 지난달 열린 제20회 부천국제만화축제에는 많은 코스플레이어와 동호인들이 몰렸다. 무더위에 화려한 장식과 통기성이 좋지 않은 소재로 된 ‘코스튬’을 입고 종일 포즈를 취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만화와 애니를 사랑한다는 열정에 코스플레이어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경기국제코스프레페스티벌 출전자는 물론, 친구들과 함께 코스프레를 뽐내고 즐기려는 이들도 몰려 야외는 금세 ‘만화와 현실의 경계에 선 공간’이 됐다. 이들은 코스프레를 하면서 얻은 점으로 한결같이 ‘자신감’과 ‘자아 발전’을 꼽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벨과 신데렐라로 분한 치니 홀과 츠키노 히카리(이상 닉네임)은 “코스를 하게 되면 평소와 다른 모습의 내가 되고, 큰 자기만족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조차도 용기가 필요할 정도의 성격이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덧붙였다. 2000년대 초반 큰 인기를 끈 만화 ‘이누야샤’의 여주인공인 히구라시 카고메로 코스프레에 나선 채원(14)양은 “전에는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했다”며 “이젠 매력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의 매력을 발견하며 자신감을 갖게된 것이 코스프레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경험”이라고 말했다. 2B 캐릭터로 나선 소녀L(17·닉네임)은 “의상 제작과 관련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며 “코스프레는 내 꿈을 찾아줬고, 진로도 잡아줬다”고 설명했다.
주로 일본 만화 캐릭터로만 가득차는 코스프레 행사장에서 빼놓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것이 ‘밀리터리 코스프레’다. 세계 각국의 군인들은 물론 창작물 내 병사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는 이들은 ‘밀코어’라 불리우며 코스프레 행사마다 주요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날 밀리터리 코스프레에 나선 양동준(21)씨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이 즐겁다”며 “폭염 속에 무겁고 더운 피복과 장비를 착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얻는 행복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일반 관람객들도 코스프레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김정민(14)양은 “나를 보며 아이들이 ‘이누야샤다’라고 외치며 즐거워하고 기념촬영을 청해왔다”고 말했다. 만화 하이큐의 ‘코즈메 켄마’로 코스에 나선 남수빈(17)양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요청도 많이 받았고, 인기가 정말 좋았다”며 “내가 주인공이 된 듯했다”고 즐거워했다. 한국만화박물관 내 전시실에는 인기 웹툰 ‘여탕보고서’에 나온 여탕 공간이 그대로 재현되고 캐릭터들이 전시되어, 어린이를 비롯한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코믹월드
지난달 22일에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149회 서울코믹월드’가 열렸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개최되는 코믹월드 행사는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용품 및 관련 수공예품 판매 부스가 들어서고, 많은 코스플레이어들이 코스 축제에 참가하여 ‘최대 동인 문화제’로 불린다. 폭우가 내린 탓에 방문객은 줄었지만, 실내는 관람객으로 가득찼다. 코스프레 축제가 열린 23일, 야외 행사를 할 수 없게된 참가자들은 좁은 실내에서 자리를 잡고 코스프레에 나섰다. ‘이누야샤’나 ‘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세계 생활’처럼 익숙한 캐릭터는 물론이고, 달걀을 원안으로 제작된 캐릭터인 ‘구데타마’를 코스프레한 참가자도 있었다. 밀리터리 코스프레 동호인들은 미 해병대 정복 차림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SETEC과 코엑스 일원에서 제21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보노보노’ 작가인 이가라시 미키오가 초청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전시회와 체험전이 열린 SETEC에서는 코스프레 축제도 함께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