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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엄재경 해설 “돌아온 스타크래프트, 팬들 있는한 GG는 없다”

“집 나갔던 아들이 비단 옷을 입고 나타난 느낌이다.”

지난달 30일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이하 리마스터) 런칭 기념행사 ‘GG 투게더’는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했던 세대들에게 전달된 ‘청춘의 소환장’이었다. 당구장 대신 PC방을 찾으며 문화사를 새로 썼던 그들, 테란·프로토스·저그를 자신의 ‘종족 정체성’으로 삼아 매일매일 우주의 운명을 놓고 일합을 겨뤘던 지금의 30~40대 ‘아재’들은 <스타크래프트>의 부름에 생업을 제쳐놓고 응답했다.

임요환, 홍진호, 기욤 패트리, 이윤열, 박정석…. 레전드들이 펼치는 경기를 보기 위해 광안리를 직접 찾은 팬만 1만여명, 포털 생중계의 동시 접속자는 5만명을 넘어섰고, 해외에서도 50만명 이상이 지켜봤다.

<스타크래프트> 경기 해설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엄재경 해설(49)도 이날 무대를 빛낸 주역의 한사람이다. <리마스터>를 금의환향한 아들에 빗댈만큼 누구보다 감동으로 이날 무대를 지켜본 그를 만났다.

e스포츠 해설가 겸 만화가 엄재경이 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인근에서 ‘스포츠경향’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솔직히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아요. 2000년 온게임넷리그 출범과 함께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들 크는 것을 보는 것처럼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의 성장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아들이 집을 나갔어요. 그런데 돌아온 겁니다. 그것도 화려하고 의젓해진 모습으로….”

<스타>를 모르는 이들이야 ‘웬 오버?’라고 하겠지만, 팬들에게선 “역시 ! 엄재경”이란 말이 나올만큼 이날 이벤트를 압축한 화려한 레토릭이었다.

그는 1세대 <스타> 해설자이자, ‘e스포츠의 개척자’로 팬들 사이에 뚜렷한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가 <스타>와 e스포츠의 역사에 중요한 것은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 ‘테란 황제(임요환)’ ‘폭풍저그(홍진호)’ ‘몽상가(강민)’ ‘광전사(변형태)’ 등 수많은 스타 선수의 캐릭터가 그의 입에서 창조됐고, 그들을 둘러싼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스타 마케팅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초창기 e스포츠는 그만큼 엄재경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스포츠 해설가 겸 만화가 엄재경이 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인근에서 ‘스포츠경향’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만화 스토리를 써서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엔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했죠. 초기에 몇몇 선수들의 별명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팬들 스스로 선수들의 별명을 짓더군요. 이런 과정이 <스타>의 인기에 한 몫했다고 생각해요.”

만화가였던 그가 <스타> 해설을 맡은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1999년 만화채널 <투니버스>의 황현준 PD가 <스타>를 스포츠 경기처럼 방송하는 것을 구상했다. 하지만 경기를 풀어갈 해설이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술자리만 가면 <스타> 얘기를 쏟아내던 엄재경을 떠올렸다. 마침 엄재경은 속된말로 ‘말빨’이 좀 되던 인물이었다.

그의 말빨과 관련한 에피소드. 초창기인 만큼, 제작 과정의 실수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스태프의 실수로 중계진 화면이 일순간 먹통이 됐다. 모든 제작진의 얼굴이 사색이 된 그 때, 엄재경의 입이 ‘따발총’을 갈겨 대기 시작했다. 화면도 보지않고 5분여가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썰’…, 당시 사고를 눈치 챈 팬들이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입신의 경지’였다.

물론, 당시만해도 ‘애들이나 하는 장난’ 같은 게임 해설을 한다고 하니 반대가 없을 수 없었다.

“이현세, 장태산 화백 등 여러 선생님들이 ‘뭔 이상한 짓을 하려하냐’시며 반대했죠. 하지만 내가 재미있으면 남들도 재미있을거야…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20여년이 흘러 팬들이 레전드라고 불러줄 만큼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보니 참 잘했다는 느낌입니다. <스타> 덕분에 이만큼 컸으니 내가 빚을 진 셈이네요.”

e스포츠 해설가 겸 만화가 엄재경이 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인근에서 ‘스포츠경향’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이후 10여년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임요환, 홍진호 등 숱한 스타들과 전설이 만들어졌고, 그 역시 전설의 일부가 됐다.

하지만 해외에까지 알아보는 팬들이 넘쳐날 만큼 화려했던 그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형제게임’ <스타크래프트 2>의 등장과 함께 저물기 시작했다.

승부조작 사건, 지식재산권 분쟁의 와중에 <리그 오브 레전드>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인기 하락과 어수선한 분위기가 겹치며 스폰서가 예전만큼 붙지 않았다. 결국 e스포츠를 본격 태동시키며 13년간 전성기를 누렸던 <스타> 공식리그는 2012년 ‘티빙 스타리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스타2> 리그가 출범했지만 세상은 벌써 달라져 있었다.

“악재가 겹쳤지만 승부조작 사건이 가장 아팠어요. 팬들의 배신감이 컸죠. 거기에 지재권 분쟁 등 여러 요인이 파도처럼 계속 밀려왔다고 할까요. 또하나 지적하면 <스타1>과 <스타2>의 게임성이 달랐던 점도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스타2>가 이상적으로 <스타1>을 계승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거든요.”

<스타1>과 <스타2>의 게임성 차이는 모든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스타2> 역시 훌륭한 게임이지만 <스타1>이 훨씬 직관적이고 전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관전의 재미에서 <스타1>의 게임성을 <스타2>가 따라오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제작사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죠. 당연히 새 게임을 팔아야 하잖아요. 하지만 승계가 자연스럽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팬들은 준비가 덜 됐는데….”

<스타>의 흥망성쇠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당사자로서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래픽을 최신 기술로 입히고, 조금만 손본다면 여전히 최신 게임을 능가할 <스타1>의 게임성을 볼때 간절함은 더욱 컸다.

“저는 오래전부터 블리자드가 <스타>를 리마스터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마이크 모하임 사장이 <스타>에 갖고 있는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알았기 때문이죠. 또 <스타>를 즐기던 세대가 이제 마음껏 지갑을 열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이것이야말로 노려볼만한 마케팅이 아닌가요?”

지난달 30일 부산 광안리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런칭 행사 ‘GG 투게더’ 간담회에 임요환, 홍진호 등 스타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한 엄재경 해설.(맨 오른쪽)

그는 <리마스터>의 미래에 대해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았다. 일단 런칭행사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e스포츠의 주류가 RTS(전략)에서 MOBA(공성 대전)장르로 옮겨간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추억의 사골국’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즐기고 감동하는 팬들이 있으면 되지. 그리고 e스포츠 전문 채널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10대 보다 20~40대 시청층이 더욱 늘어나는 추세라더군요. 실제 인구 비율도 그렇고. 방송도 이런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겠죠.”

무엇보다 그가 <리마스터>를 반기는 이유가 또 다른데 있다. 모든 게임이 궁극적으로 갈구하는 영속적인 생명력 추구의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리마스터> 출시는 e스포츠 역사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입니다. <스타>가 바둑이나 장기 같은 지위를 획득하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대합니다. 물론 <롤> <오버워치> 등 다른 게임들에게 좋은 선례가 되겠죠.”

마지막으로 <스타>가 자신에게 무엇인지 묻자 그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엔 내 삶이다, 인생 자체다… 그런 식으로 답했는데, 이번에 보니, 요환이는 물론 제동이, 영호 같은 후배들도 그렇게 답하더군요. 그래서 바꿨습니다. 내 아들같은 존재라고…. 리마스터가 나를 부르면 언제든 팬들과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전용준 OGN 캐스터

■Tip

- 전용준 캐스터에 대해.

“참 오랫동안 함께 방송을 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사건이 있다. 전용준에게는 묘한 버릇이 있다. 캐스터와 해설은 항상 앞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얘기해야 하는데, 자기가 어떤 질문을 하면 해설자를 쳐다보는 습관이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게 된다. 그런데 나는 평소 흥분해서 말을 하면 입에서 부산물이 많이 ‘발사’되는 스타일이다. 어느날 사건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침도 아니고 유난히 큰 ‘왕건이’가 발사돼 전용준의 잇몸에 철싹하고 들러 붙었다. 그냥 봐도 전용준의 잇몸에 붙은 알갱이의 크기가 보일 정도여서 그가 실제 느꼈을 ‘타격감’도 상당했을터였다. 그런데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기 할말을 다하더니 카메라가 돌아간 틈을 타서 뱉어내더라. 그는 두말할 필요없는 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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