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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기사 보기] 故 김광석 아내, 서해순 14년 전 인터뷰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그의 노래만큼이나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상호 기자는 영화 <김광석>을 통해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시했고 이어 김광석 딸, 서연이도 이미 10년 전 죽은 사실도 폭로했다. 대중들의 시선은 홀로남겨진 故 김광석의 부인이자, 故 서연이의 엄마인 서해순씨에게 향하고 있다. 서해순씨는 지난 2003년 1월호 ‘레이디경향’을 통해 남편의 미발표곡과 공연실황을 담은 앨범 <김광석 컬렉션>를 발매하며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용에는 서해순씨가 주장하는 김광석과의 만남, 결혼 그리고 죽음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또 당시 그의 아이 이름은 서우였으나 이후 2006년 서연으로 개명된 사실도 이번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고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 씨. 사진 레이디 경향

■“영원한 가수 김광석과 성장장애 겪는 딸 서우의 유전자는 순수예요”

고 김광석의 노래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힘이자 격동의 시대를 뚫는 에너지였다. 육신의 생명은 멈췄지만 노래의 생명은 영원한 법. 그간 구설수와 상처를 딛고 김광석의 감춰진 노래를 발굴해 우리 앞에 내놓은 그의 아내 서해순 씨의 삶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성장장애를 앓는 딸 서우와 함께 남편 김광석을 추억하며 지냈던 7년.

김광석은 불귀의 시간을 넘어 7년 만에 돌아왔다. 김광석은 젊음 그대로다. 언제나 서른세 살에서 더 이상 늙지 않는 몸으로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가 사람들에게 헌정한 곡들은 그의 주검을 넘어 영속의 생명을 덧입었다. 1000회의 라이브 공연을 마친 얼마 후인 1996년 1월, 1000번을 접어 학이 되어 날아간 종이학의 전설처럼 홀연히 이승을 등졌던 그다. 하지만 시공을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심장 깊숙한 곳에 그는 살아 있다. 대학로 학전소극장의 무대나 불교방송을 타고 퍼졌던 FM 전파에서도 언제나 “행복하세요”로 마무리하던 그의 막간 인사말은 사탕발림에 싫증난 사람들에겐 더없는 청량제였다. 쉼 없이 쏟아내던 삶의 파장을 닮은 노래 이야기는 힘에 부치지만 그런대로 버티며 살아내게 했던 생명의 에너지였다. 그렇게 우리를 살게 하고 그는 떠났던 것.

그런 그가 2002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팬들에게 거의 알져지지 않았던 곡들과 미발표 공연 실황 등을 담은 음반 <김광석 컬렉션 : 마이 웨이 1964~1996>으로 말이다. 음반은 ‘편지’, ‘바람’, ‘달’, ‘풍경소리’로 이름 붙여져 4장의 CD와 DVD로 재현됐다. 그간 들어왔던 베스트 앨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물원 출신 김창기가 작사·작곡한 ‘내가 필요한 거야’. 처연한 애절함 속에서도 시원하게 뻗어가는 김광석의 전형적인 창법이 귓가를 울리는 이 곡을 아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 지난 92년 가수 하덕규가 주도해 제작한 ‘지구촌 굶주린 이웃을 위한 밀알 프로젝트 앨범’에 실렸던 곡인데, 이번 앨범을 통해 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리틀 히어로’(원제 : 배트를 들라)는 94년 삼성 프로야구단에서 직원용 한정판으로 제작한 옴니버스 음반 <꿈의 구장>에 수록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노래다. 같은 해 MBC 대학가요제에서 불렀던 ‘타는 목마름으로’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라이브곡.

미발표 공연 실황 곡들로 구성된 ‘바람’ CD에는 92년을 전후해 대학로 등지에서 불렀던 ‘말하지 못한 내 사랑’ ‘외사랑’ 등 11곡이 담겼고, ‘이등병의 편지’에는 안치환의 멋진 코러스가 뒷받침해 듣는 즐거움을 더욱 크게 한다. ‘풍경소리’는 김광석이 어린 딸 서우와 노는 모습, ‘그날들’ ‘서른 즈음에’의 뮤직비디오 등을 담은 DVD. 지인들의 추모사와 김광석의 생전 일기로 곱게 꾸며진 50페이지의 포토에세이도 눈길을 끈다.

유고 앨범치고는 신작 앨범 못지않게 신선하다. 돈을 벌어보자고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 같진 않다. “이제 감추어진 김광석의 노래는 없다”라는 그의 부인 서해순 씨(37)의 얘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앨범은 ‘아빠를 많이 찾는 딸 서우에게 아빠의 사랑을 담아서 주고자 준비한 선물’이라고 한다. 지난 5월에 서우의 열한 번째 생일이 지났지만 생일선물이라 생각하며 준비했다. 서우가 자라면서 아이의 기억에 아빠의 잔상이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김광석의 공연장을 자주 찾았던 탓이다. 딸 서우 입에서 그의 얘기를 들으며 아빠 김광석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일을 남편과 함께했어요. 결혼하고 나서 자연스레 음반작업이 생활이 됐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음악을 만들지에 대한 것들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든 타의든 그런 일에서 점점 멀어졌어요. 제가 나서면 돈을 벌어보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고 김광석의 딸 고 김서연 씨. 사진 레이디경향

■딸의 자신감 찾기 ‘맹모삼천지교’

물론 당시 서해순 씨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맞이한 그의 죽음에 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로한 시아버지를 통해 판권을 인수해 앨범을 내는 바람에 가족 갈등도 없지 않았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감당해야 했던 숱한 의혹, 판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시아버지와의 갈등을 마음으로부터 정리하려는 뜻도 이번 추모 앨범 출시와 맥이 닿아 있다. 지난 7월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나이를 따 ‘워드33’이라는 음반기획사를 차렸다. 그의 노래 ‘일어나’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있는 걸…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음반 수익금은 김광석 재단인 ‘행복한 나무’와 서울 재즈 아카데미를 통해 김광석 장학금 등으로 쓸 예정이란다. 내년 2, 3월에는 추모 공연도 가질 계획이고 “생전의 남편이 하고 싶어 했던 재능 있는 포크가수 발굴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밝혔다. 무대는 한국에 국한되지 않다고, 세계 속에 우리 노래를 심는 작업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시작한 일이다.

김광석의 유지를 받들기까지 그녀는 혼자 서는 연습을 톡톡히 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이 딸 서우 문제, 더는 나이를 먹지 않는 아비처럼 그의 딸 서우도 성장장애라는 가슴 아픈 병을 앓고 있다. 그 생각만 하면 서해순 씨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키와 몸무게가 다른 아이에 비해 눈에 띄게 차이를 보였고, 지적 능력도 더딘 성장과 보조를 맞췄던 것. 신장도 몹시 안 좋아 몸에 살이 많이 붙었다. 고 나이 때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은 뻔한 일이었고, 어느 하루 눈물을 안 흘리는 날이 없었다.

마침 미국에 사는 절친한 친구에게 다녀올 일이 있어 미국으로 갔고, 그곳에 있는 몇 달간 모녀는 정말 오랜만에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서우 입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아서 좋다”는 말이 나왔을라고. 이런 반응에 힘을 얻어 미국에 정착했다. 뉴멕시코와 시카고, 캘리포니아에서 3년을 특수교육 시설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서우도 세상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서해순 씨는 은둔 생활을 청산할 용기를 얻었다.

그녀의 서우에 대한 사랑만큼, 생전 김광석의 서우에 대한 사랑도 안타까움이다. 바쁜 생활 탓에,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따뜻하게 해주어야 할 딸아이에게 소홀한 것을 못내 미안해했다고. 그 역시 서우의 병을 알고 있었기에 가슴 아픔은 컷을 게다. 그의 일기장에는 “하루라도 편히 아이와 놀아줄 여유가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사랑을 아는 듯, 아침마다 아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유치원에 가는 서우에게도 다시 볼 수 없는 아빠는 아쉬움이다.

고 김광석의 부인 서해순 씨와 딸 고 김서연 씨. 사진 레이디경향

■우연이란 이름의 필연, 죽음이란 이름의 영원

그들은 정말 우연히 만났다. 대학 입시를 마치고 마땅한 소일거리를 찾지 못하던 그녀는 과외 선생님을 따라 ‘품바’ 공연장에 놀러 갔고, 공연이라는 낯선 무대를 보는 이상으로 낯선 사내를 만났다. 금테 안경을 낀 깐깐한 여고생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건 사내가 김광석이다. 작은 키에 단물 빠진 껌마냥 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옷차림이었지만, 이상하게 계속 곱씹게 되는 기억을 남겼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김광석의 넉살 좋은 기다림으로 만남은 이어졌다.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마음도 정리할 겸 아버지가 사업차 머무르던 홍콩에 갔죠. 그리고 그이를 다시 만난 것은 한국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예요. 재수를 시작했는데, 학원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당황스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했지만, 이후 오누이처럼 잘도 지냈어요. 편지도 주고받고, 함께 군것질도 하면서요. 그때는 사랑인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시험 전날, 약속도 없이 집 앞에서 커다란 엿뭉치를 들고 있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공부와 직장생활이 핑계라면 핑계라고. 언젠가 이대 앞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본 그것이 다였고, 라디오를 통해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의 소식을 간간이 아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먼발치에서 대할 때마다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후 다시 공연장에서 김광석과 마주했던 것. 대기실을 찾지 않았으나 운명인양 출입계단에서 마주쳤다. 여전히 넉살 좋게 그녀를 대하는 모습과 그간의 아쉬움이 녹아 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1990년 6월, 결혼을 했다.

그러나 가객(歌客)의 생활이 갑자기 좋아질 리는 없었다. 고정 수입이 없어 생활을 이어가고자 서해순 씨는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물론 회사까지의 에스코트는 김광석의 몫이었지만, 여유로운 웃음 속에 그의 미안함도 적지 않았던 듯.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생전 인터뷰는 생활의 곤궁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결혼하고 나서 4~5개월 동안 통장은 항상 영이었어요. 총각 시절엔 그저 내 한몸 버텨가면 그만이었는데, 가장이 되어 아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몹시 괴롭더군요…. 아내는 직장생활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말없이 나를 밀어주었어요. 인정받는 것은 우선 아내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서해순 씨가 아이를 가지면서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는 언제나 붙어 있었다. 하루 종일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고 여행도 다녔다. 공연에 관한 일이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렇다고 없던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양가 부모에게 손을 벌리기 싫었던 그들은 김광석이 직접 서우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첫딸은 복이라는 말처럼, 그것도 의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받아냈으니 그 이후로 공연 섭외가 줄을 이었다. 게다가 공연은 언제나 매진. 졸지에 서해순 씨는 매니저가 되었고, 두 사람의 부창부수는 국내에서는 전례 없는 라이브 공연 1천 회의 대기록을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공연에 대해서는 결벽증에 가깝게 완벽을 추구하는 김광석이었기에 연일 이어지는 공연 스트레스는 건강은 물론 감정에도 상처를 주었던 듯싶다. 그가 성공적인 라이브 공연 기록을 수립해가는 이면에 질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나간다는 이유로 싫은 소리를 듣고 욕도 먹고 손가락질도 받아야 했던 것.

상처는 치유될 시간을 갖지 못했고 주위의 시선은 그 상처를 덧나게 했다. 방송에서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지쳐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구설수도 이어졌다. 그리고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짧은 생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겠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수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감동을 ‘자유롭게’란 노래에 실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수첩 한 켠에 꽂아둔, 딸 서우와 아내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일삼아 했다.

고 김광석의 부인 서해순 씨와 고 김광석의 모습(왼쪽부터). 사진 레이디경향

■가객, 죽어서 온전히 노래로 남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죽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삶 자체가 노래였다. 76년, 경희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악기는 물론 악보 보는 법을 익혔다. 79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합창단 생활을 했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고, 1학년 때 대학연합동이라 ‘연합 메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리고 84년,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들었다. 제대하고 가수 김창완의 후원에 힘입어 <동물원 1집>을 내놓았다. 이 앨범은 스스로도 어리둥절할 만큼 많이 팔려나갔고, 5집까지 승승장구했다. 이후 동물원과 헤어져 89년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1집을 내놓으며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이후로도 음악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생전 정규 앨범 4집에 ‘다시 부르기’까지 솔로 무대를 이어나갔던 것.

김광석이 음악 초창기에 민중음악에 빠지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교원노조 사건으로 교단을 떠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위로가 되기보다는 종종 피해를 입히는 모습을 봐왔던 것이 이유였다고 말해왔다. 자신에게 사람들과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무기로 음악이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밝혀왔던 것.

우리 시대의 다행 중의 하나는 김광석 같은 음유시인이 있었다는 것일지 모른다.

“문명이 발달해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그의 메아리는 공염불이 아니었다. 물론 그 비상구에서 그 자신은 헤어나오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 지시등대로 희망에서 삶의 기운을 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 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이라고 말했던 그에게서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잡아가고 있는 셈.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유언처럼 남긴 그의 말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노래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이번 <김광석 컬렉션>의 출시를 계기로 다시 그 사랑을 되새기고 갚아야 할 시기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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