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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그림 다듬기를 알려준 글 다듬기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다섯 번째 책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김정선 지음 / 유유)다.

“…무수한 비문과 오문을 쓰는 실험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시간과 공간, 그러니까 다른 거리감과 감수성을 찾는달까요. 그것도 최대한 즐겁게 말이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는 문장 다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 김정선은 20년 넘게 단행본의 교정과 교열을 보는 일을 해온 베테랑 편집자다.

이 책은 어색한 문장을 훨씬 보기 좋고 우리말다운 문장으로 바꾸는 비결을 소개하고 있다. 자신이 오랫동안 작업한 수많은 원고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색한 문장의 전형들과 문장을 이상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추려서 뽑은 후 그 문장들을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설명한다.

실용서지만 책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 부분은 마치 학창 시절 따분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던 여담처럼 흥미롭다.

문장그림-20171021 40×40㎝ Oil on Canvas

문장 교정에 대한 책이니만큼 자신의 문장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물론이다. 글쓰는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인 나로서는 이 책의 발견이야말로… 뭐랄까, 플라잉 더치맨호를 탈취한 잭 스패로 선장의 기분이랄까? 아무튼 보물단지 같은 책이기도 했다.

한편 화가인 나에게는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선사한 책이기도 하다. 책이 설명하고 있는 ‘글 다듬는 법’을 고스란히 ‘그림 다듬는 법’에도 나는 온전히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왜 그 자리에 그 표현이 들어가면 어색한지, 그것이 꼭 필요한 부분인지, 너무 습관적이지는 않은지 등을 계속 의심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문장을 검토하라는 조언은 나의 화폭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나는 그림을 다 완성하면 그것을 벽에 걸어놓고 몇 달을 보며 지낸다. 그러다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발견되면 다시 떼어내어 계속 수정하는 습관이 있다. 같은 작품일지라도 거기에 다른 시·공간이 선사하는 객관적 거리감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전혀 새로운 예술적 감수성이 있다. 나는 그것까지 내 화폭에 담는 것을 선호했다. 이 책은 그 작업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해주었고, 내 스스로의 작업스타일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 화가에게 확신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사실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서 깨닫는 것, 거리를 두어야 보이는 것들이 인생을 끝없이 다듬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수정이 곧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종 개악이 되기도 한다. 본래 답도 없고 완성도 없는 삶이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고스란히 표현한다’는 것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자신을 온전히 투영할 수 있어야 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로부터 반성과 자기성찰도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전환해 보기로 했다. 나는 붓을 들자마자 후회했다. 문학도 인문학도 아닌, 이 문법 실용서를 그림으로? 어떻게 봐도 황당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 책마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의 어떤 책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 점이 무척 매혹적이었고, 나는 일단 한번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인생이 고달프다. 아무튼 붓을 들었다.

오주석의 명저 <한국의 미 특강>에는 동양화를 보는 방법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나온다. 서양화와는 달리 동양화를 볼 때는 시선을 오른쪽 위에서부터 시작해 왼쪽 아래로 순차적으로 시선을 훑어가야 한다. 옛날에는 글의 방향이 그랬다. 이것은 동양의 글과 그림이 본질적으로 하나였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사상이 우위였고 글과 그림은 공통적으로 그 사상을 드러내는 일종의 도구였던 셈이다.

나는 ‘문장그림’을 그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의 모든 문장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무한대의 의미들이 우주를 만든다. 나는 눈을 감고 ‘의미의 우주’를 이미지로 떠올려 보았다. 어떤 문장은 강렬하며, 어떤 문장은 조용하고, 다른 문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나는 문장의 세상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견고한 조화로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좋은 책이 그러하듯 나 역시 밝은 희망의 메시지를 조화롭고 안정적인 구도로 화폭에 그리고 싶었다.

롤랑 바르트는 “시간은 수학적 단위가 아니라 감수성의 의미론적 분할”이라고 했다. 문장그림을 벽에 걸어 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림은 다른 시간의 감수성으로 그 시간의 의미에 맞게 다른 이야기를 펼칠 것이다. 없애고 싶거나 고치고 싶은 부분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의미 있는 자유로움’으로 나와 세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림을 다듬다가 모두 지워 버려야 하는 상황이 생겨도 나는 결코 즐거움을 잃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예술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는 ‘궁극의 놀이’여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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