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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 마비 딛고 희망을 부르는 함영국 “내 음악이 치유의 다리가 됐으면”

걸음걸음 낙엽이 밟히는 이맘때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서울 홍제동 인근을 달리던 택시가 길가던 두 청년을 치었다. 한 사람은 즉사, 또 한사람은 목숨만 붙은 채 병원으로 실려갔다.

사고로부터 딱 1년 뒤, 1987년 가을이 되어서야 당시 25살이던 함영국(55)은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전과 같지 않은 귀가였다. 더이상 두 다리로 온전히 낙엽을 밟을 수 없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오월음악사 함영국 원장이 자신의 얘기를 노래로 들려주고 있다.|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병원에 있을때부터 하반신 마비가 될 것이란 얘기를 듣지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막상 세상을 다시 마주하고 보니 상실감은 마음의 준비를 훌쩍 넘어섰다.

사는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삶을 포기하다시피한 생활이 1년여 이어지던 즈음, 연락이 왔다. 사고전 다니던 악기사 겸 음악학원의 사장으로부터였다.

학원에 나와 아이들을 다시 가르쳐봐라….

솔깃했다. 암흑 속에서 반짝하고 성냥이 켜진 느낌이었다.

사고 전까지 음악은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때 비틀즈, 짐 크로츠, 제임스 테일러를 만났다. 그냥 좋았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맛에 대학도 포기했을 만큼 좋았다. 함께 사고를 당해 죽은 ‘소리형’도 그때 음악으로 만난 ‘도반’이었다.

하지만 반짝했던 성냥은 금세 꺼지려했다.

“제가 다리만 못쓰게 된게 아니었어요. 사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팔은 물론 온 몸이 자연스럽지 않아요. 당시엔 어땠겠어요? 마음 한편에선 하고 싶었지만 그 몸으로 어떻게… 하는 또다른 마음이 더 컸죠. 그런데 사장님이 아무 생각말고 두달만 나와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시한부 강사 생활이 시작됐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욕심이 났다. 의욕이 솟아났다.

함영국 원장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마침 사장이 개인 사정으로 악기사를 내놓아야할 일이 생겼다. 기회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돈. 하반신 마비의 아마추어 음악가에게 1500만원란 거금이 있을리 없었다.

마음을 엿본 부모님이 돈을 내놨다. 장애인 자식이 혼자 먹고 살 길이나마 당신들 생전에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달동네 집을 처분한 돈이었다. 온 가족이 악기사 뒷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는 더이상 취미가 아니었다. 좌절이나 상실감은 사치였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나의 노래는 양식이고, 삶이고, 나의 힘’이 돼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오월음악교습소’라고 간판을 달았다.

“사고때 죽은 ‘소리형’의 유품을 정리하다 ‘오월’이라는 곡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했어요. ‘바람이 바람에 날리어…’로 시작되는 곡을 듣는데 형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고, 혼자 살아남은 것이 미안하기도 했어요. 그 분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때 그 마음처럼 음악을 하자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죠.”

다리에 힘이 돌아오는듯 했다. 진정성 가득한 가르침에 수강생이 늘고, 성실한 그를 보고 악기를 사려는 발길도 분주해졌다.

자신감이 생기자 꿈이 다시 찾아왔다. 비록 음반 한장 내보지 못한 ‘동네 가수’였지만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소리형’과 함께 했던 소극장 공연을 떠올렸다. 결국 제자 몇몇을 꼬드겨 기어코 무대에 올랐다.

함영국 원장이 굽은 손가락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자신감은 인생의 반려자와의 만남까지 주선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수강생이었다. 음악 취향이 같아 평소 좋은 후배로만 생각했는데, 어느날 풋풋한 웃음이 가슴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했다. 자신의 처지로 볼때 언감생심이었다. 그만큼 힘든 결정이고 힘든 순간이었다. 시간을 달라던 그녀가 며칠 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1992년이었다.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 주셨죠. 천사의 보살핌으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딸은 엄마를 닮아 사회복지사를 하고, 둘째인 아들은 음악을 공부하는 것도 재밌죠.”

이 시기에 즈음해 일도 술술 풀렸다.

음악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소문을 타면서 김민기가 만든 ‘겨레의 노레’ 음반에 ‘이 세상에’란 곡(본명 함영재)으로 참여도 했다.

또 91년 결성한 노래모임 ‘소리쌓기’의 멤버가 9명으로 늘고, 비록 대가 없는 공연이지만 섭외도 들어왔다. 지하철 무대는 물론 지역 축제까지 재능기부 형식의 공연이 이어졌다.

입소문은 꿈에 그리던 음반 녹음으로 이어졌다. 2008년 자전적 얘기를 담은 1집을 시작으로 ‘소리쌓기’와 함께 3장의 앨범을 냈다. 최근에는 소리형과의 음악 생활을 돌아본 ‘소리형을 기리며’라는 음반도 선보였다.

비록 대중에 널리 알려진 노래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쉬움은 없다. 지난날 소리형과 함께 꿈꾸던, 노래가 그대로 삶이고, 음악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습을 위해 모인 소리쌓기 멤버들.

“요즘 지켜보면 어린 학생들보다 어르신들이 음악을 배우러 많이들 오세요. 무언가가 그립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옛 시절에 대한 추억,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어요. 보잘것없는 동네 가수지만 그런 분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이 되고 싶어요.”

그는 최근 서울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서울을 모아줘’ 프로젝트에도 자신의 가게 ‘오월음악교습소’와 함께 힘을 보탰다. 사람들에게 추억을 찾아주고, 많은 이들이 꿈과 함께 하루하루를 사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제 음악이, 제가 평생을 모아온 물건들이, 제게 해줬던 것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다리가 돼주면 좋겠어요.”

■소리쌓기는?

노래모임 소리쌓기는 91년부터 이어온 아마추어 노래모임이다. 멤버는 9명이지만 실제 연습때 모이는 인원은 훨씬 많다. 결성 초기 20대 초반이던 멤버들이 이제는 자녀들을 데리고 나오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며 교체되는 일도 있지만, 외국에 나가 살게된 멤버들이 여전히 연락을 해오고, 귀국땐 반드시 모임을 찾는다. 모임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도 두 쌍이나 된다.

그들이 노래하는 것은 일상의 삶. 소시민들에게 위안이 되는 노래를 더 많은 곳에서 들려주는게 목표다. 그래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무료공연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소리쌓기’에 대해 함영국 씨는 “천사아내와 두 자녀가 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소리쌓기와 그 가족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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