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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사랑스러운 삶에 대한 통찰 ‘섬에 있는 서점’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여섯 번째 책은 <섬에 있는 서점>(개브리얼 제빈 지음 / 엄일녀 옮김 / 루페)이다.

섬에 있는 서점

“사람들은 정치와 신, 사랑에 대해 지루한 거짓말을 늘어놓지. 어떤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한 가지만 물어보면 알 수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섬에 있는 서점>은 뉴욕 출신의 작가 개브리얼 제빈의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섬 전체에서 하나밖에 없는 작은 동네서점 ‘아일랜드’, 그 소박한 장소를 중심으로 따뜻한 비밀과 극적인 반전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서점 주인의 이름은 ‘에이제이 피크리’. 그는 얼마 전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서점 운영도 영 신통치 않다. 행복하지 않은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선물이 도착하며 그의 인생이 변화한다. 소설의 문체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지만, 읽는 이들에게 삶에 대한 사랑과 통찰을 느끼게 만드는 깊은 여운도 잃지 않는다.

책장을 펼치면 챕터의 첫 장마다 주인공 에이제이가 남긴 메모의 글귀가 등장한다. 수많은 문학작품들에 대한 논평과 삶의 철학이 담긴 문장들이다. 그중 가장 평범한 문장 하나가 문득 가슴으로 들어왔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 의외의 질문 앞에서 순간 당황했다. 꽤 오랫동안 책을 사랑하고, 많은 책을 읽어 왔다면서 어떻게 ‘가장 좋아하는’이라는 그 간단한 조건 하나를 충족시키는 책을 가지고 있지 못할까? 스스로에게 의아했다.

내가 한 권의 책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그 책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야기에 감동하고, 상상하고, 아프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그 과정은 사랑의 느낌과 가장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평을 그림으로 작성하는 나의 작업은 러브레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들의 오래된 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Q. 가장 매력적인 여자는?

A. 방금 만난 여자!

이 농담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피식거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남자들은 좋겠다.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해서!’ 책의 세계는 많음과 다양함이 끝없이 펼쳐지는 일종의 생태계다. 그러니 오히려 단순하고 명료해야만 보이는 무엇인가가 따로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오래된 농담의 은유를 고스란히 차용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가장 좋아하는 책을 묻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된다. 남자도 가끔은 이렇게 쓸모가 있다.

나는 <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 소설 속 그 ‘앨리스 섬’에 가보고 싶었다. 매사추세츠 동남쪽 하이애니스에서 페리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상세한 설명이 있지만, 실제로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여권을 꺼내거나 할 생각은 없다.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소설 속이다. 거기는 아내를 잃고 삶의 의욕까지 잃은 에이제이가 다시 사랑을 만든 곳이다. 서점 앞에 버려져 서점에서 자라 예비 작가로 성장해 가는 소설 속 마야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비행기를 탈 일은 없겠다. 나는 대신 그곳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했다.

내 마음의 디저트 섬, 65x53㎝, Oil on Canvas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앨리스 섬은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들이 홀로 방치되지 않는 곳이다. 사랑을 스스로 발열하는 곳, 나는 그런 따뜻한 섬을 그리고 싶어졌다. 게다가 앨리스 섬이라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르기도 하는 나의 그곳은 온갖 책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책의 터널을 지나는 길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책에서 나무가 자라나고 그 나무에 열매처럼 책이 열리고, 책이 새처럼 날아가기도 한다. 알록달록한 책의 방파제들이 섬 주변을 에워싸고 있기도 하다. 섬 이름이 ‘앨리스’인 만큼 토끼도 빠질 수 없다. 얘는 나의 그림 속에선 숨바꼭질하듯 숨어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다.

나의 앨리스섬을 그리는 내내 나는 그곳을 비현실적인 채로 놓아두고 싶었다. 에이제이가 서점 주인으로서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뜻밖의 선물을 받아들이면서, 사랑으로 구원받은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림을 완성하고 멀리서 바라보니, 섬이라기보다는 온갖 달콤한 것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디저트처럼 보인다. 기분을 끌어 올려준다는 뜻의 티라미수(tira mi su)디저트처럼 내 잠재의식 속의 책이란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런 달콤한 존재이기도 했다. 나의 무의식까지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나는 토끼의 굴로 따라 들어간 앨리스처럼 내가 그린 책의 섬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누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책에 코를 박고 있는 토끼를 발견하면 나는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토끼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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