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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그림을 그리는 기쁨을 먹고 살 뿐이다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열아홉 번째 책은 <수학자의 공부>(오카 기요시 지음 / 정회성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이다.

‘수학은 우주의 정서를 지성이라는 질서의 문자판에 표현하는 일종의 학문적 미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다시 글로 표현하는 이 기묘한 프로젝트를 2년 가까이 진행하면서 내가 얻은 생각 중 하나다.

책이 질서를 요구한다면, 그림은 그 질서의 해체를 원한다. 여기에 글을 보태는 것은 내 방식대로의 재구성이다. 질서와 해체와 재구성의 이 변증법적 순환을 통해 나는 나만의 예술적 동력을 얻고자 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실험이겠다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인데, 하면 할수록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재미 삼아 바다에서 자맥질을 하다가 우연히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손에 쥐게 된 인간의 심정이랄까? 이것이 나의 운명을 대체 어디로 가져다 놓을지 알 수가 없다. 실험은 모험이 됐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대신 늘 심장이 요동치며 가슴이 설렌다.

<수학자의 공부>는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1963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세대를 관통하며 대를 이어 읽히고 있는 명저다. 이 책을 쓴 오타 기요시는 다변수함수론 분야의 최대 난제였던 ‘3대 문제’를 해결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수학자다. 그의 연구 업적은 프랑스 수학자 앙리 카르탕에 의해 계승돼 이후 ‘층 이론(sheaf theory)’을 구축하는 토대가 됐으며, 그로부터 ‘다변수복소함수론’이라는, 수학의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다변수복소함수론’ 같은 수학용어는 외계어와 다름없다. 만약 이 책이 그런 외계어를 설명하려는 책이었다면 나는 진즉에 책장을 덮었을 것이다. <수학자의 공부>는 수학자 오타 기요시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인생관과 공부법에 대한 생각을 적어 놓은 책이다. 나는 천재적 수학자의 일상적 태도와 생각이 궁금했다. 책은 기대대로였다. 과연 그는 위대한 수학자다웠다. 자신의 책을 55년 후에 읽게 될 내 호기심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예상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던 내가 수학을 잘했거나 좋아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삶을 살면서 그림과 수학의 깊은 관련성을 직감하곤 했다. ‘예술은 수학’일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평생 그 연관성을 더듬거리고만 있었다. <수학자의 공부>는 나의 둔한 더듬이에 레이더를 장착해 주었다고나 할까? 내가 오랫동안 사유했던 삶과 예술의 길에 기막힌 힌트들을 던져준다.

오타 기요시는 예술을 무척 사랑하는데, 책에는 이 수학자의 천재적이고 기념비적인 학문적 성과의 근원에는 다름 아닌 ‘정서를 귀하게 여긴 삶’이 있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정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서를 조화롭게 만드는 것에 그림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불균형에 균형감을 주고 조화를 살리는 면에서 예술과 수학의 본질이 같다’는 것이 그 이유다. 나는 이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쉽게 말해 ‘=’, 즉 ‘이퀄(equal)’을 만드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여기에 상상력과 창의력·구상력·구도·선·색… 등등 다양한 미술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수학문제를 만들고 다시 스스로 풀어 조화로운 이퀄의 세상을 만드는 것과 그림 그리기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과정인 것이다.

조화와 균형을 배우기에 가장 좋은 대상은 ‘자연’이다. 저자는 수학의 세계 역시 자연관찰의 경향성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학적 자연’을 일궈내는 열쇠는 ‘정서’라고 강조한다. 자연은 조화와 균형, 정서를 배우기에 가장 완벽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화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하지만 화가뿐일까? 인간의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 ‘자연’에 있을 것이니 말이다. <수학자의 공부>의 마지막 책장을 덮자마자 내가 장미꽃을 관찰하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저자의 힌트 때문이다. 장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연약한 장미꽃잎의 얇은 굴곡 모양이 사람의 옆얼굴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사람의 얼굴들이 모여서 한 송이의 장미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장미꽃잎들이 규칙적으로 모여서 한 송이의 장미를 이루고 있지만, 이제 나의 미술적 정서에서는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이 모여서 꽃을 만들고 있다.

<장미의 정서(情緖)>, 33.5x24㎝, Oil on Canvas

화폭에 나의 정서를 그리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사람의 표정으로 꽃잎을 그린다. 다양한 색으로 꽃잎마다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한다. 붓질을 하고 있지만 조화를 찾기 위해 머릿속은 계속 ‘+ -’ 계산을 하고 있다.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장미’라는 자연을 통해 표현된 나의 정서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림은 이렇게 나 자신을 대상화할 수도 있게 만들고, 추상적인 것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도 한다.

“봄 들녘의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피어 있으면 그뿐이지 않은가. 피어 있는 것의 소용은 제비꽃이 알 바 아니다. 피어 있느냐 피어 있지 않으냐, 중요한 문제는 그것뿐. 나로 말하자면, 단지 수학을 배우는 기쁨을 먹고 살 뿐이다.”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느냐는 물음에 이 수학자가 내놓는 대답이다. 누군가 나에게도 똑같이 물어주길 바란다.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기쁨을 먹고 살 뿐이다. 나는 나의 그림 속에서 끝없이 이퀄의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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