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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여자 이전에 사람이다…‘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스물한 번째 책은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나혜석 지음 / 장영은 엮음 /민음사)이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나혜석 단편소설 <경희> 중에서)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은 문인이자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글을 모아 엮고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근대 여성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장영은 교수가 나혜석이 남긴 소설과 수필, 인터뷰와 논설 중에서 그녀의 페미니즘적 세계관과 육아관·정치의식 등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을 선별한 책이기도 하다.

단편 <경희>는 나혜석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을 쓴 자전적 소설이다.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며, 딸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주인공 경희는 “계집애도 사람인 이상 못할 것이 없다”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도 평범한 삶과 자신이 선택한 불안한 삶의 사이에서 내면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경희는 ‘여성’이기 이전에 독립적 주체로서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기로 결정한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고작 이 명제 하나…. <경희>는 1918년 작이다. 나혜석은 이 소설을 쓸 때 무엇을 희망하고 또 어떤 삶을 떠올렸을까. 100년 후를 살아갈 여성들이 1918년의 자신과 똑같이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임을 이토록 눈물겹게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과연 그녀는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혜석 앞에서 부끄러웠다.

나혜석을 만나고 싶었다. 최초의 여성 일본유학생,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이혼 여성…. ‘최초로서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의 삶을 내 손으로 더듬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이 문장을 나는 눈이 아니라 온 육신으로 읽었다. 그녀의 당당함에 가슴이 떨렸다. 그녀의 용감함에 탄성이 터졌다. 그녀의 치열함에 소름이 돋았다.

나혜석은 100년 후의 나에게 ‘탐험하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탐험이란 목숨을 거는 여행이다. 무지를 안고 미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위험에 다가가야 하며, 고통을 견뎌야 하며, 운명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워야만 한다. 그것이 탐험이다.

나혜석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탐험하는 나혜석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지도책을 단서 삼아 나혜석의 위치를 짐작했다. 그곳은 바로 ‘붉은 정글’이었다.

초록이 엉켜 있는 정글이 아니다. 사람의 피, 바로 그 빛깔의 붉은 정글! 살아서 가장 용감했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최후의 탐험지, 그곳이 바로 붉은 정글이다. 살아서 모든 최초였던 이가 최후에 가 닿았을 곳이라면, 바로 그런 공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붉은 정글-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 65x53㎝ Oil on Canvas

나혜석을 만나기 위해 나는 붉은 정글을 그려야만 했다. 그리고 나의 그림 속에서 나는 결국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이제 ‘질문’이었다. ‘너도 이 아름다운 탐험을 함께할 거지?’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나는 용감하지 못한데 당신처럼 탐험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나혜석은 대답 대신 내가 들고 있던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의 한 페이지를 열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기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패배란 없다) 우리의 가장 무서워하는 불행이 언제든지 내습할지라도 염려 없이 받아넘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아무러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 중에서 일신일변할지언정 결코 패배를 당할 이치는 만무하다.”

붉은 물감을 가득 머금은 붓을 캔버스에서 내려놓으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 스스로를 잊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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